비만약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번 노르하임의 제약회사 보노보디스크는 다음 신약으로 영생 주사를 출시한다고 밝혔다. 영생이라니!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곧 임상 단계에서 목격된 효과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중환자들이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집에 갔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보노보디스크에 따르면 영생 주사는 중병을 치료하고 세포를 재생하며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쇠약해진 근육과 뼈까지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영생 주사와 함께라면 이제 인류는 예전의 인류가 아니었다. 인류 2.0이었다. 가히 신의 영역이었다.
기독교는 강력 반발을 하고 나섰다. 당장 신약 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오직 신께서만 정하시는 삶과 죽음 문제에 개입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고 천벌 받을 일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최고 주가를 연일 갱신하고 있던 보노보디스크가 그 정도에 꿈쩍할 리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곧 공장을 증설해 수요에 대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기독교계가 강력한 성명서를 냈다. 지금부터 보노보디스크산 약뿐 아니라 노르하임산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불매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범기독교 인구는 세계에 20억 명이나 있었다. 보노보디스크의 주가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매운동에 참여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보노보디스크의 매출이 큰 타격을 입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노르하임의 다른 기업들도 피해를 보고 있었다. 보노보디스크는 결국 영생 주사 프로젝트를 철회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기독교계는 ‘참회와 회개 뒤에는 항상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보노보디스크를 용서한다’라는 입장문을 냈다.
보노보디스크가 영생 주사 철회를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 한 사람이 퇴사를 했다. 영생 주사 개발팀의 차석연구원 차석원이었다.
카이스트에서 공부했던 차석원은 교수님의 추천으로 노르하임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여자친구인 엘라 요르겐손이 그를 꼬셨다. 노르하임에서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차석원은 여친의 말을 일단 듣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면접을 본 끝에 보노보디스크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생 주사 프로젝트에 꽤 깊숙히 관여했다.
그러나 회사가 프로젝트를 포기함에 따라 자신이 있을 곳이 없어졌다. 와중에 러브콜이 쏟아졌다. 자기네 회사로 오라는 제안들이었다. 차석원은 이번 기회에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제안의 수준을 보건대 이번에도 외국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100만불? 200만불? 받고 싶은 연봉이 얼마인지 말만 하시오.” 사우디의 제안이었다.
“100명? 1000명? 몇 명의 보조 연구원이 필요한지, 말만 하시오.” 중국의 제안이었다.
“뉴욕의 펜트하우스? 샌프란시스코의 대저택? 살고 싶은 곳이 어디든, 말만 하시오. ” 이건 미국.
한편 한국 회사에서는 이렇게 왔다.
“연봉 4천만원. 4대 보험 가입.가족 같은 분위기. 캡슐커피 제공.”
그리고 또 하나, 좀 이상한 제안도 있었다.
“연봉 3백만 루블. 숙식 제공. 복지로 1년에 1명씩 꼴보기 싫은 사람 화끈하게 해치워 드립니다.”
러시아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차석원은 여자친구와 엘라와 의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잔뜩 들뜬 채 집으로 돌아갔다. 엘라는 과연 어느쪽 제안을 선호하려나? 아무래도 서구권인 미국이려나, 아니면 사우디의 오일 머니를 택하려나? 어느 쪽이든, 남친이 이렇게 잘 나간다는 걸 알면 엘라가 무척 자랑스러워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차석원은 눈이 튀어나오고 턱이 땅으로 떨어질뻔했다. 엘라가 벌거벗은 채 소파 위에서 교성을 지르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악!
엘라 밑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가 엉덩이를 들었다놨다 하면서 애를 쓰고 있었다. 두 남녀는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차석원이 들어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차석원은 조용히 집을 나왔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가서 단골 맥줏집에 들어갔다. 칼스버그를 시킨 그는 자리에 앉아 이메일을 열었다. 그리고 메일에 쓰여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러시아어로) 여보세요?”
“(영어로) 차석원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그쪽 연구시설로 이직 제안을 해주셨길래 전화드렸는데요.”
“(러시아어 액센트 가득한 영어로) 아, 미스터 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좀 해보셨는지요?”
“다른 얘기 전에… 그 복지 말입니다. 아직 입사를 한 건 아니지만 당장 그 복지 혜택을 좀 누리고 싶은데요.”
“오, 해치우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어디 사는 누구지요?”
“엘라 요르겐손. 주소는…”
“아니, 됐습니다. 엘라가 누군지쯤은 저희도 알아요.”
“...나에 대해 조사했습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만큼 저희는 미스터차를 모셔가는 일에 진심입니다.”
차석원은 괜히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러시아로 언제 이주할 수 있습니까?”
“엘라를 먼저 처리해주세요. 이쪽 일은 한 달 안에 정리하겠습니다.”
“엘라는 방금 처리했습니다. 2주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러시아로 오세요.”
“네?”
상대방은 벌써 전화를 끊은 뒤였다.
차석원은 잠시 꿈을 꾼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방금 내가 뭘 한 거지? 러시아놈들은 대체 뭐지? 그러다 문득, 그는 엘라를 살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차석원은 맥줏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는 전화 상대방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집 근처에 경찰과 이웃이 잔뜩 모여 부산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택시에서 내린 차석원을 보고 이웃들이 잔뜩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남자와 눈이 마추졌다. 아까 엘라와 뒹굴던 놈이었다. 놈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중이었다. 자조치종은 몰라도 러시아쪽에서 킬러를 고용해 순식간에 엘라를 해치우고, 내연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모양이었다.
‘일석이조다.’
내심 내연남도 죽여버리고 싶었던 차석원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일처리가 뛰어난 집단이라면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