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만 단편선 #12
엘라가 죽은 열흘 뒤에 차석원은 러시아로 떠났다. 목적지는 북부의 비밀도시 노릴스크였다. 아주 독특한 복지를 제공하는 직장, ‘스탈린 리서치’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차석원은 스탈린 리서치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었다. 보노보디스크에서 했던 연구의 비밀을 모두 발설하고, 새로운 영생약을 만들었다.
차석원 덕분에 스탈린 리서치는 영생 주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다만 그들은 보노보디스크 같은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약은 암암리에 고위인사들에게만 팔아야지, 대대적으로 공개했다가는 여론의 뭇매만 맞을 게 뻔했다.
스탈린 리서치는 곧 주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구매자는 주로 정부측 비밀요원들이었다. 비밀요원들이 오래 살고 싶어 주사를 샀느냐고? 아니었다. 기억하시다시피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은 이반 뻬뜨로브였다. 뻬뜨로브가 누구였던가? “푸틴 때가 좋았지”라는 여론을 형성했던,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독재자 아니였던가! 서슬퍼런 뻬뜨로브 정권에서 공무원들이 감히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주사를 산다는 시나리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뭘 위한 거였을까?
당시 뻬뜨로브 정부의 비밀요원들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CCDR 사람들을 다룬 걸로 유명했다. CCDR이란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연합, 즉 정권 입장에서는 반정부 조직이었다. 문제는 고문 과정 중에서 CCDR 사람들이 자꾸 죽어버린다는 거였다. 요원들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얻기도 전에 송장 치우는 일이 반복됐다. 고민 끝에 그들은 CCDR들에게 영생 주사를 맞히기로 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내면서 줄기차게 고문하기 위해서였다.
비밀요원들의 시도는 효과가 있었다. 잡혀온 CCDR 사람들은 죽지도 않고 계속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씩 정보를 불었다. 공범의 이름, 아지트의 주소… 요원들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도 반정부 단체를 말끔하게 박멸하는데 성공했다. 그 직후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뻬뜨로브는 지지율 100%로 열 두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빼뜨로브가 승승장구 하는 동안 스탈린 리서치도 잘 나갔다. 그들은 영생 주사에 이어 진실 알약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먹으면 진실만을 말하는 약이었다.
사실 이번 신약은 고객의 목소리를 반영해 만든 거였다. 영생 주사는 요원들에게 분명한 도움이 되었지만 고문이란 여전히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의견을 냈다. 힘들게 고문해서 뭔가를 캐내지 말고, 약 한 방에 진실게임 안될까요? 스탈린 리서치는 진지하게 그 문제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제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스탈린 리서치의 영업팀 2인조는 비밀요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크렘린궁 지하2층에서 CCDR 대응팀의 우두머리, 이바노프를 만났다.
미하일 이바노프는 빼뜨로브 정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 중 하나였다. 반정부 인사들을 처리하는 일을 총괄하는 그는 원래도 의심 많은 성격인데다 이 직무를 맡으면서 더 괴물같이 변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딸이 진짜가 맞는지, 혹시 CCDR이 분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본다고 했다.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두 사람은 제법 긴장했다. 이바노프가 혼자 회의실에 들어오자 영업팀은 그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샘플 약을 꺼냈다.
이바노프는 천천히 샘플약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분석팀에서 잠깐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라고, 영업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바노프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자 누가 들어와 샘플을 받아 나갔다.
“그나저나, 계약에 대해 논의를 드리고 싶은데…”
영업팀이 말하자 이바노프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뭐 급할 것 있겠습니까. 아직 차도 나오지 않았는데, 차 나오면 천천히 이야기 하시지요…”
영업팀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누군가 들어와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고 나갔다.
“제법 향이 괜찮은 차입니다. 드셔보시지요.”
영업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과연 훌륭한 향이 났다.
“두 분은 어디 출신인가요?”
이바노프가 질문했다. 아무래도 오늘 본격적인 계약 얘기를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 명은 모스크바 출신이라고 답했고 다른 한 사람은 노릴스크 출신이라고 말했다. 이바노프는 그 뒤로도 전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질문을 해댈 뿐이었다.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간이 조금 흘렀다. 문득 이바노프가 둘 중 한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모스크바 출신이라고 하셨나요. 가장 이루고 싶으신게 뭡니까?”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빨리 성공해서 은퇴하고 좀 편하게 사는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노릴스크에서 오신 분께서는요?”
이바노프가 다른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러나 노릴스크에서 왔다는 영업사원이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뻬뜨로브 정부의 몰락. 우리 CCDR에 의한 혁명 완수입니다.”
‘맙소사!’
모스크바 출신 영업사원이 생각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들어와!”
별안간 이바노프가 큰 소리를 쳤다. 그러자 문이 쾅 열리며 요원들이 뛰어들어왔다. 그들은 노릴스크 출신의 머리를 책상 위로 짓누르며 순식간에 손과 발을 결박했다. 난리통에 찻잔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며 쨍그랑! 하고 깨졌다. 그 모습을 보고 모스크바 출신이 곧 정황을 깨달았다.
‘우리가 가지고 온 샘플을 차에 탔구나!’
결박 당한 사람은 바지에 오줌을 지려버렸다. CCDR라는 게 들통난 이상 그의 앞날에는 두 가지 중 하나 밖에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고문 당하다 죽는 거, 다른 하나는 영생 주사를 맞고 평생 고문을 당하는 거였다. 그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이 사람은 이제 달달달 이를 부딪히고 있었다.
모스크바 출신 사람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여태 같이 일했던 동료가 첩자였다니. 게다가 괴물이라고 소문난 이바노프에게 그걸 걸렸다니. 모스크바 출신 역시 표정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이 특수하고 복잡한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반응을 비쳤다.
그런데 이바노프의 경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CCDR을 또 체포해서 기쁘다는 감정도, 또 다시 고문을 해야 해서 싫다는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스탈린 리서치의 제품 중에는 감정을 없애는 약도 있었다. 이바노프는 그 약을 먹은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일까? 엉뚱하게도 두 영업사원의 머릿속에는 그런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