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만 단편선 #14
서기 2044년,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창당신청서가 한 장 접수되었다. 당명은 ‘맥주당.’ 선관위는 누가 장난을 치나 싶었지만 읽어보니 그건 5천명의 당원 명부가 적힌 진짜 창당서였다. 결국 선관위는 이를 승인했고, 맥주당이 창당되었다.
다음은 맥주당의 홈페이지에 적힌 창당 선언문이다.
건국 이래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내실을 다지는데는 실패했다. 출산율 꼴찌, 자살율 1위, 행복지수 최저순위라는 지표들이 그 사실을 오랫동안 지적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성장 이데올로기에 갇혀 오늘보다 잘 사는 내일, 올해 보다 더 많이 버는 내년만 바라보며 스스로와 서로에게 채찍질을 해 왔다. 그러나 경제성장 둔화는 이미 세계적인 기조이며, 성숙기에 진입한 시장이 도입기때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없음은 명백한 이치이다.
성장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성장만 울부짖는 아이러니는 더 많은 국민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맥주당을 창당하며 선언한다.
우리는 성장의 광기로부터 벗어나, ‘슬로 라이프’를 존중하고자 한다. 이 선언은 국민을 내모는 낡은 시대정신을 거부함으로써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노는 것을 지지한다. 맥주는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음료이며 우리가 경쟁의 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맥주는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든다.
저성장 시대에 우리는 자연과 조화롭게 살며, 소비와 소비에 대한 무차별적인 추구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삶을 즐기고, 느긋하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건배!
맥주당은 그 해에 있었던 총선에서 무려 6명의 비례대표를 국회의원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6명의 의원들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국민들과 맥주 파티를 벌렸다. 성장만을 위해 쉴새 없이 달려온 대한민국이 한숨 돌리는 여유를 가지도록 하겠다는 거였다. 정말 그 때문이었을까? 제 27대 국회가 종결을 맞이하던 2048년 무렵, 대한민국의 자살율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행복지수는 껑충 뛰었으며 소비 역시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맥주 판매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여론은 맥주당의 비전이 정말 의미 있는 거였다며 맥주당의 성과를 추켜세웠다. 맥주 산업이 발달한 독일에서는 특파원을 파견해 이 현상을 자세히 취재해가기도 했다. 이런 기세에 6명의 맥주당 의원들은 다음 국회가 시작되면 최근 주류판매제한 나이 하향조정을 입법하겠다고 공헌했다.
그러나 총선 결과 6명의 맥주당 의원들은 모두 연임에 실패했고, 28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전원 체포되고 만다. 검찰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6명의 의원이 모두 국내 주류회사 A사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후원 받고 있었다. 함께 구속된 A사의 주요임원에게 기자가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맥주당의 의원들에게 불법 후원을 한 겁니까?”
그러지 임원이 짧게 답했다.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