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마음 : 시기심
신과 사람에게 사랑받던 어느 수도사를 마귀들이 유혹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성적 자극으로, 돈과 재물로, 음식과 편안한 생활로 온갖 유혹을 했지만, 존경받을만한 수도사는 끄떡없었다. 마귀들이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여유롭게 대장 마귀가 나섰다. 대장 마귀는 초보 수도사로 변장하여 수련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존경받을만한 수도사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며칠 뒤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떠났다. “스승님,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전에 배웠던 스승님이 더 훌륭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분께 돌아가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수도사는 쓰린 감정을 숨기고 변장한 마귀를 배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도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전에 있던 스승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수도생활을 멈추고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온갖 유혹을 견딘 수도사도 극복하지 못한 마음이 시기심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마음 역시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끈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물론 시기심이 원동력이 되어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하도록 돕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힘으로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아니면 반대로 시기의 대상에게 비판적이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인색하게 대한다. 대상을 공격함으로 자신의 시기심을 감추려는 교묘한 꼼수다.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들에 집착하며 과도하게 경쟁하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부분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더 좋은 스승이 되려는 경쟁 때문에 더 중요한 수도생활 자체를 놓아 버린 어느 수도사처럼 말이다.
시기심을 일으키는 원인은 "비교"가 아니다.
이처럼 끈질기고 강력한 시기심을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무엇이 우리 안에 시기심을 만드는가? 많은 이들이 비교라고 답할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큰일이다. 깊은 산속 수도생활의 장소에도 비교가 있는데, 하물며 치열한 경쟁이 가득한 일상생활에는 얼마나 비교가 많겠는가? 실제로 형제, 친구, 동료, 심지어 엄마 친구 아들에게까지 수없이 많은 비교를 당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텐데, 그때마다 시기심에 허우적거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러나 다행히 시기심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비교가 아니다.
교회 건물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 중에서 내 자동차가 가장 싼 자동차에 속한다. 그러면 나는 자동차를 비교하면서 고급 외제차를 타는 사람에게 시기심을 느껴야 할 텐데, 의외로 시기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수도사가 극복하지 못한 시기심을 목사가 극복한 걸까? 아니다. 단지 내가 자동차에는 큰 관심이 없을 뿐, 관심 있는 다른 분야를 비교하면 시기심의 큰 파도에 휩쓸려 버린다. 예를 들면 내 브런치 글의 조회수와 라이킷 수는 고만고만한데, '내 글보다 잘 쓴 것 같지 않은 글'의 라이킷 수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을 때 시기심에 마음을 정복당한다. '내 글보다 잘 쓴 것 같지 않은 글'이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다른 이의 글을 깎아내리는 시기심이 가득하지 않은가?
글에 대한 비교가 내게 시기심을 불러온 것에 반하여, 자동차에 대한 비교가 시기심을 만들지 않은 점은, 비교라는 행위 자체가 시기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라는 증거다.
잘못된 자기 정체성이 시기심의 진짜 원인이다.
살펴본 것처럼 비교가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릴 때 시기심이 올라온다. 그 무언가가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최고라서 결코 다른 이들에게 지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을 건드리는 경우다. 전자가 열등감이라면, 후자는 우월감이다. 혼동하기 쉬운 점은 비교가 만들어내는 것이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비교가 시기심의 원인이라는 말인데, 방금 전에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구분이 필요하다. 시기심의 원인으로 제시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비교 이전에 이미 자신의 정체성 안에 자리 잡은 열등감과 우월감을 말한다. 내 경우로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비교는 내 차와 차주인 나를 열등의 자리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열등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해서 내 안에 시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자동차에 대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킷 수에 대한 비교는 내 안에 시기심을 만든다. 왜냐하면 라이킷 수를 비교하기 이전에 이미 내 글이 가장 좋아야 한다는 우월감이 혹은 내 글이 가장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열등감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우월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이니, 아마도 둘 다 내 안에 있지 않을까?)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걸리버를 생각해보자. 평범한 성인 남자였던 걸리버는 15cm 정도 크기의 사람들이 사는 소인국 릴리펏에서는 거인이지만, 9살 여자 아이의 키가 12m나 되는 거인국 브롭딩낵에서는 소인이다. 의사였던 걸리버는 영국에서 지식인이지만, 말(휘넘)이 고귀한 존재로 나라를 다스리는 휘넘국에서는 가장 하등 한 존재다. 그렇다면 걸리버는 어떤 존재인가? 거인인가? 소인인가? 열등한가? 우월한가? 걸리버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걸리버가 릴리펏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신을 거대한 존재라고 여길 것이다. 얼마나 우스운 착각인가! 12m의 브롭딩낵 소녀를 만났을 때, 시기심에 뒷목 잡고 쓰러졌을 것이다. 한편 휘넘국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자신을 하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는 얼마나 불쌍한 오해인가! 스스로를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비교할 때마다 시기심에 슬피 울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걸리버가 자신을 영국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기준을 두었다면, 이상하고 별난 존재들과의 비교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저 걸리버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살고 있는가? 거대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작고 볼품없는 사람으로 여기는가? 만약 어리석은 우월감이나 불쌍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아마 영국 사람이 브롭딩낵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잘못된 기준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와 다른 무언가를 기준으로 삼고, 어리석게 자신을 거대하고 우월한 사람으로 착각하거나, 반대로 열등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길 필요 없다. 못하는 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열등한 위치에 놓이면 당연히 속상하지만, 받아들이면 시기심이 오는 것을 웬만큼 막을 수 있다. 몇 가지 못한다고 열등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반대로 내가 남들보다 대단하고,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좋아해야 한다는 착각도 내려놓자. 남들보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 만큼만 나 답게 하면 된다.
결론 부분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그래서 시기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모르겠다. 어찌해서 말을 한다고, 그것이 어찌 가능할까? 다만 열등감에 초라해지고, 우월감에 어리석게 행동하며, 시기심에 교묘해지는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본다면, 아쉽겠지만 과장하지 않고, 어렵겠지만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아주 조금은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자신을 인정하고 찾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어떤 비교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시기심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비교가 아니다.
둘. 이미 내 안에 있는 잘못된 열등감과 우월감이 비교와 만날 때, 시기심이 생긴다.
셋. 자신을 비하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만큼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넷. 모든 사람은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 충분한 자기 자신일 뿐이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