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가 나타나다 :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마을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고 먹을거리와 농사지을 땅을 둘러싼 싸움도 일어났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툼을 조정하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줄 지배자가 필요해졌습니다.
얼마 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본 글입니다. 청동기 유물을 소개하는 글 중 일부인데, 이 글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가 되면서 정착을 하게 되었고, 정착을 하면서 안정과 풍요를 얻었고, 그래서 더 나은 사회로 발달한 것인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농경사회가 되어서 경쟁과 다툼이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지배자가 등장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발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지배당하고, 경쟁과 다툼을 하며 사는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를 통해 얻은 풍요가 모든 것을 보상해 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수렵사회보다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행복해졌을까요?
책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사피엔스. p124)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으로 식량의 총량이 확대되었지만, 보통 사람들의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축소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늘어난 식량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보통 사람들만큼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지배자들과 방자한 엘리트들이 가져갔습니다. 사기 같은 이런 일이 산업혁명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농부에서 노동자가 된 이들은 그전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부와 풍요를 만들었지만, 그 열매들은 자본가들이 가져갔고 정작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갔습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농업혁명의 목적이 단순히 식량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보통 농부 가정의 밥상을 건강하고 맛있게 만드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산업혁명의 목적 역시 효율과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보통 노동자의 저녁 시간을 여유롭게 만드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4차 산업혁명 역시 보통 사람인 우리의 더 나은 삶을 보장해주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사회의 변화가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야 한다는 진짜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변화의 결과물에 속지 말고, 결과물이 만든 그늘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봅시다.
작고 약한 이들을 희생시켜서 사회가 변화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다짐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살펴보는 일입니다. 사회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소외된 것처럼, 우리가 일하고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행동 속에서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 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까? 나의 노력이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을 웃게 만들고 있나요?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희생당하여 울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하루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나의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아졌나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까요?
벚꽃이 가득해서 산책하기 좋은 시절입니다. 산책하면서 각자의 하루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사회와 자기 자신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