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화가의 집에서 태어나 값비싼 물감으로 풍경이나 그리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글쎄, 쥐어진 것은 투박한 노 한 자루. 강줄기 하나.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을 건너편으로 데려다주고 나서는 일도 없어 우는 풀벌레나 관찰하기. — 너도 삶이 지루하여 우느냐, 그래도 함께 노래하는 동무라도 있지 않니. — 한때는 배를 두고 멀리멀리 가볼까 마음 먹은 적도 있었지. 먼지 쌓인 오두막을 쓸고 닦는 데에 젊음을 다 바치는 게 싫어서.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망설이는 사이 갈대밭은 훌쩍 커버렸고 그 너머부터는 가본 적이 없거든. 받아들이기로 한거야. 겁많은 난쟁이에겐 그만한 동굴이 어울리는 법이니까. 그때부터는 온갖 핑계거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어. 아, 신발 밑창이 찢어졌네. 이런 채로 걷다 가시라도 밟으면 큰일이지. 그래서 여태껏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거야. 오래된 기억을 기워 갈라진 틈을 막으면서. — 자, 손님. 바지 밑단 젖지 않게 조심히 타시구려. 배가 낡아 가끔 이리 물이 들이칩니다.
사공(沙工)이 말하신 삶이 더 좋지요. 돌아다니는 일도 오래 할것이 못됩니다. 그런 건 민들레 홀씨나 부평초의 것이지 피와 살이 있는 우리 인간의 몫이 아니니까요. 한번은 당산나무 아래서 팔을 이렇게 쭉, 벌리고 한참을 서있었어요. 발에서 뿌리가 자라나 땅속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면서요. 그런데 갖은 애를 써도 밉살맞은 운명은 그렇게 두지를 않더란 말입니다. 몇 해 지나면 옮기고, 또 얼마 있으면 옮기고. 쫓기듯 떠날 때마다 사랑을 한움큼 떼어 동네 어귀에 두었어요. 인사 못 전하고 떠나 미안한 마음을 누구라도 알아주기 바라며. 그 애들이 그것을 발견했을까요? 미처 보기도 전에 여우가 물어갔을까요? 그게 아니어야 할텐데요. 수많은 밤 동안 풀을 헤치며, 길을 걸으며, 하늘을 보며 그 골목을 떠올렸거든요. 이번에 가면 수평선이 훤히 내다보이는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쉬려고 합니다. — 손님도 나도 둘다 원하는대로 살지 못했구려. — 어디 우리만 그렇겠습니까. — 그것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