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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Oct 08. 2021

핀볼의 자유의지

<비브르 사 비> 해석

 당신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당연히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나 때로 삶의 주인이 스스로가 아니라는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주변 환경 혹은 주변 사람에 의해서 정의되고, 방향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죠. 여기, 나나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있습니다. 나나는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청춘입니다. 레코드 샵에서 레코드를 팔며 살아가죠. 때로는 포트폴리오를 위해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이런 나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현실은 점점 옥죄어 옵니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던 나나는 라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성매매 세계로 발을 들입니다. 영화의 제목 'vivre sa vie'는 프랑스어로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나나는 영화 초반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서 점점 "비브르 사 비"를 잃습니다. 


 <비브르 사 비>에는 반복적으로 거울이 등장합니다. 1장에서 나나와 폴이 대화하는 카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카메라는 나나와 폴의 뒷모습만 잡고 있습니다. 이들 정면에는 거울이 있죠. 이 장면에서, 나나의 얼굴만이 거울에 비춥니다. 폴의 경우 거울을 통해서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11장, 한 신사와의 대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거울이 등장합니다. 거울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영화 초반과 후반에 거울을 각각 배치하여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유도합니다. 거울과 같은 의미를 가진 요소가 또 있습니다. 바로 9장에 등장하는 춤입니다. 나나는 라울과 함께 루이지를 만나러 갑니다. 루이지와 라울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나는 주크박스에서 음악을 고르고 2층을 무대로 춤을 춥니다. 갑자기 나나는 우울해지는데요. 춤을 추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춤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나나는 극이 진행됨에 따라서 하나씩 잃어갑니다. 1장에서는 폴이라는 남자 친구를, 2장에서는 돈을 잃었죠. 3장에서는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8장에서는 성매매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자유를 점점 잃어갑니다. 9장에서는 행복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엔 목숨까지 잃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나나는 점점 파멸을 향해 달립니다. 9장에서의 춤은 그녀가 목숨을 잃기 전 최후로 남은 자유이자 최후의 발악입니다. 춤은 한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나나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지만, 그 춤은 남을 유혹하기 위한 춤에 불과했죠. 이를 깨달은 그녀는 우울해집니다. 포주 라울에게 속박되어서 자유마저 빼앗긴 그녀에겐, 이제 목숨만이 남았습니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카메라 움직임은 가히 파격적입니다. 기존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기법들이 사용되었죠. 대부분의 영화에서 카메라의 존재는 배제되기 마련입니다. 카메라의 시점은 관객이 보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카메라를 통해서 배우들의 연기에 녹아듭니다. 예를 들어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저수지의 개들> 오프닝을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합니다. 한 사람이 나서서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라는 음악의 자의적인 해석을 말하죠. 이때,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여줍니다. 관객은 제 3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대화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비브르 사 비>는 이런 몰입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관객의 개입을 반복적으로 막죠. 7장 라울과의 대화 장면에서 나나의 얼굴은 라울에 머리에 의해서 이따금 가려집니다. 카메라는 오른쪽과 왼쪽, 정면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마치 제 3자가 라울과 나나의 대화를 지켜보듯 구성했습니다. 카메라로 몰입을 막을 수 없을 때는 음악을 개입시킵니다. 갑작스럽게 음악이 들리고 이내 갑작스럽게 중단되어 관객의 개입을 막습니다. 혹시 6장의 시작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장면이 시작되었음에도 나나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대략 3초 정도 멈췄다 이동합니다. 이는 편집 오류가 아닌 관객의 몰입을 깨기 위한 장치로 철저히 의도된 샷입니다. 나나가 이따금 제4의 벽, 다시 말해 화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나나를 통해서 관객 자신의 삶을 돌아보길 바라는 감독의 뜻을 담았습니다. 


 영화의 제목 <비브르 사 비>는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영화 초반, 나나는 친구 이베트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린 자유로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내 책임. 불행한 것도 내 책임...(후략)" 나나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철학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이 철학은 깨집니다. 바로 포주 라울의 대사를 통해서이죠: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해. 돈을 내는 사람이 항상 우위에 있지." 이 대사가 나오는 순간, 나나는 자유를 잃었습니다. 영화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핀볼은 이런 나나를 상징합니다. 핀볼은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그저 플레이어가 쏘는 대로 이동할 뿐이죠. 영화 초반, 나나는 폴과 핀볼 게임을 즐깁니다. 이후 다시 핀볼을 마주했을 때, 포주 라울이 핀볼 기계를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핀볼 게임을 즐기던(자유의지를 가졌던) 나나는 이제 라울이 즐기는 핀볼 기계 속 핀볼(자유를 잃었다)이 되었습니다. 라울에 의해서 움직이는 핀볼 그 자체 말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브르 사 비>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영화 중반 등장한 신사와의 철학적인 대화 때문으로 예상됩니다. 나나는 뜬금없이 옆 자리에 앉아있던 신사에게 다가가 술을 사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더니 자신이 말을 하고 싶지만 자꾸 말문이 막힌다고 하죠. 이후 복잡하고 심오한, 철학적인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의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삶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인생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단절과 연속을 반복하는 행위입니다. 신사는 책 <20년 후>를 인용하여 나나에게 설명합니다. <20년 후>의 주인공 포르토스는 힘은 세지만 멍청한 캐릭터입니다. 그는 한평생을 생각 없이 살아왔죠. 어느 날, 지하실에 폭탄을 설치한 후 빠져나오던 중 "어떻게 발 앞에 다음 발을 놓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나아갈 수 없었고, 폭발로 인해 죽었습니다. 신사는 이어 플라톤을 인용합니다. 생각과 말이 같다고 말하죠. 또한, 인간의 생각과 말은 불완전해서 말을 하는 도중에 침묵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생각을 확장하면 한 개인의 인생이 됩니다. 인간은 평생을 말을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죠. 즉, 자꾸 말문이 막히는 이유는 생각이, 아니 인생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단절은 자연스러우며 우리는 결과적으로 진리를 찾기 위해 단절과 대화를 이어간다고 하죠. <비브르 사 비>가 총 12개의 극으로 나뉜 이유입니다. 12개의 극은 나나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하죠. 불완전하고 짧은 나나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관객과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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