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직업에 윤리의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기 빡빡한 세상에서 윤리 따위를 외쳐 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다. 돈만 많이 벌고 들키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세상 아닌가.
그게 나의 신념이었다. 내가 가진 직업이 크게 비윤리적이기도 했고 그에 따른 보상도 큰 편이었다. 내가 가진 직업은 뒷골목에서 주로 이뤄지는 목표에 대한 거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살인청부업자였다.
뒷골목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행색은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를 썼으므로 아마 고객일 경우가 높았다. 그에게 다가가자, 이런 짓이 처음인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또한 신변의 보호를 위해 그 남자와 행색이 비슷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느릿한 걸음으로 그 앞에 섰다. 그러자 그는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사람을 죽여주세요.”
그 종이에는 이름과 사진 그리고 전화번호 주거지까지 적혀있었다. 남자와 나이대도 비슷해 보였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전 연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신변 조사를 마친 후에 예정 금액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10% 정도 선금으로 주셔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남자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지금 하는 짓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다시 물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느다랗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연락처와 날짜, 시간이 적힌 종이를 건네며 내가 말했다.
“연락은 여기로 주시면 됩니다. 돈은 현금으로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거래는 성사되었고 이제 여기서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강으로 건너게 된다. 살인 청부업이라는 게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도대체 죽일 만큼 무슨 원한과 생각이 있기에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지 말이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행에 옮길 뿐 모든 것은 의뢰자가 한 짓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작업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이번 표적은 신변이 꽤 확보된 상태여서 작업이 쉬울 거로 예상한다. 그녀의 이름은 유은정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가냘픈 상체와 하체 그리고 어깨로 뚝 떨어지는 짧은 단발머리와 얇은 턱선, 오뚝한 콧날, 큰 눈망울이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표적을 죽이고 돈을 챙기겠다는 그런 직업정신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실제로 보는 순간 내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따라붙어 평범하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복숭아향 향수가 은은하게 코 밑을 맴돌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 즉, 타인에게 말을 걸지 않을 텐데 그녀는 달랐다. 자신의 작은 머리에 맞지 않게 큰 안경을 쓴 채로 눈웃음을 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사 오셨나 봐요?”
이런 경우는 가끔 있었기에 그냥 둘러댔다.
“아뇨. 친구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러면 1203호? 아니면 1201호?”
꽤 자세하게 묻자 어떻게 답을 얼버무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 찰나 일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한 번 숙이며 작별을 고하고 빠르게 나갔다.
그 이후로는 그녀의 동선을 조사했다.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32번을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간 뒤에 내렸다. 물론, 그 버스에는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를 쓴 나도 있었다. 그녀는 바른 사람이었다. 임산부, 노인, 장애인에게 좌석 양보를 해주는 건 당연했고 버스 기사에게도 친절하게 인사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바로 맞은편 건물에 있는 일 층 카페에 들어갔다. 크림치즈 베이글 하나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계산대에서 머물렀다. 곧이어 음식이 나오자, 그것을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가 일 인석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계속해서 두들겼다. 나는 그녀의 가로 기준으로 반대편에 앉아 밖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셨다. 뒤쪽의 빽빽한 건물과는 상반되게 그녀 앞의 유리창은 울창한 숲이 푸른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계속해서 흘깃하며 쳐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직업을 하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노트북의 화면을 보아하니 개발자는 아닌 것 같았고 번역가나 작가일 확률이 높았다. 프리랜서라는 뜻이며 사라져도 딱히 특정한 사람이 찾지 않아 작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그대로 네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향했다. 다시 32번 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을 가서 오피스텔의 1202호에 들어갔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그녀의 창문 너머를 봤다.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돌핀 팬츠에 민소매 하나만 걸쳤다. 틈새 사이로 작은 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였으며 하얀 살결이 햇빛에 비추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반복해서 지켜봤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택배 기사조차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장을 본 것도 아니었다. 창문 너머에는 언제나 커튼을 걷히고 살결을 드러낸 채로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약속된 날짜가 다가왔다. 오후 열한 시 인적이 드문 뒷골목에서 의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 분 정도가 지났을 때 그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가 건넨 첫마디는 의외였다.
“아직도 예쁘나요?”
그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이고 싶은 상대에 관한 궁금증이 조금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에게 선금 삼백만 원을 먼저 말해놨다. 질문을 무시한 채로 그것만 받고 다음에 일과를 보고할 예정이었다. 내가 답했다.
“선금은 삼백만 원입니다.”
그가 든 현금 가방을 받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는 가방을 등 뒤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세요. 걔는 아직도 예쁜가요?”
한숨을 길게 쉬었다. 표적에 미련이 남은 건지 아니면, 아직 어떠한 감정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경우 관계를 물어 철저히 하는 게 맞기에 물었다.
“혹시 어떤 관계였죠?”
“연인이었어요.”
유추한 대로 딱 떨어져 맞았다. 짜증이 몰려왔고 이 의뢰에 관해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어 보여 질문을 던졌다.
“의뢰하신 거 후회하시나요?”
“아뇨. 후회는 안 합니다. 그래서 예쁜가요?”
대답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네. 일반인 기준으로 예쁩니다.”
그는 마스크를 썼음에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는지 눈꼬리가 내려가 있었다.
“다행이네요. 그 얼굴을 이제 안 볼 수 있어서. 선금은 여기 있습니다. 처리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방을 건네받고 안에 있는 액수를 확인했다. 정확히 삼백만 원이었다. 가방을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고 샤워 후 거실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아까의 은은한 복숭아향이 코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헐렁한 민소매 사이로 도드라진 그녀의 가슴이 자꾸 생각났다. 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우연의 일치로 그녀와 나의 방 구조가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집 안을 서성거렸다. 이제 그녀를 죽일 일만 남았다.
아침에 그녀가 나가는 시간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나오는 순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목에 칼을 찌른 후 빠르게 빠져나온 다음 CCTV가 없는 뒷골목으로 갔다. 일정 시간 머무른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올 계획이었다.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런데 예상보다 그녀가 십 분 정도 빠르게 나왔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잠깐의 침묵을 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어! 오늘도 놀러 오셨나 봐요.”
“네.”
“근데 집 앞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맑고 깊었다. 그 눈에 사로잡혀 답변하지 못했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옷 색깔의 배합과 청초한 인상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평생 누군가를 죽이며 죄책감을 가진 적이 없는데 그녀를 죽인다면, 죄책감이 들 것이고 그것을 넘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이 나와야 하는데 진실만을 답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게 뻔하다. 그녀가 할 일은 이제 문을 닫고 나를 무시한 채로 원래 하던 일을 하러 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답변은 예상을 깼다.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요?”
“당신을 죽여달라고 했어요.”
“누가요?”
“전 남자 친구가요.”
“저는 여태까지 남자 친구가 없었는데요?”
그러면 그는 누구일까. 분명 연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마도 자기 혼자만의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스토커나 과몰입한 사람에 불과할 확률이 높았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그녀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경우가 있었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두서없으며 앞뒤도 맞지 않았다. 누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법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다. 결국, 마지막의 한마디가 모든 걸 종결했다.
“누군가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해요.”
그녀는 가만히 듣다가 내 손을 끌어당겨 집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실, 그 힘은 미약해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식탁에 서로 마주 본 채로 앉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능숙하기라도 한 듯이 냉장고에서 탄산음료 두 캔을 꺼내 놓았다. 조금 전까지 에어컨을 틀었는지 찬 기운이 깔려 있었다. 캔 외벽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 그녀가 말했다.
“저 좀 지켜주세요”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죽여달라는 말과는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기에 느낌이 이상했다.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싶었다.
“그 사람을 죽여 달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아마도 그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뭐부터 해야 일이 처리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단정 짓는 건 아니다. 그저 따뜻한 포근함이 내 일상에 젖혀 들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게 전부다.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런 일 처리를 거의 십 년 넘게 하면서 벌은 액수는 상상한 만큼 되니까 말이다. 이런 말이 먼저 오가기 전에 나는 마치 우리가 밀고 당기기를 하듯 말했다.
“저랑 조금 더 알아가시죠.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당분간은 나가지 마시고 같이 있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눈에서 눈망울이 맺혔다.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감정이 터질 듯이 말이다. 나는 위로하는 법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놔두고 휴지 몇 장을 가져다가 줄 뿐이었다. 몇 분이 흐르고 흐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주 간 같이 지내면서 우리는 서로 많은 대화를 해나갔다. 그녀의 직업은 에세이스트였다. 책을 두 권 출간했고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나름 업계에서 알아주는 정도는 된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아는 친구도 딱히 없어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라는 온기를 지금 느끼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내 진실을 전부 얘기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찌를 때 터져 나오는 피의 양, 죽기 직전 내는 앓는 소리 그런 것들은 그녀와 제일 먼 반대편에 있는 세상의 지평선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그 사이 동안 의뢰자에게 계속해서 독촉 연락이 왔지만,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협박했지만, 그럴 자신까지 있는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다. 역시 이 주가 지나고도 우리를 찾아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함께한 시간은 적었지만,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고 깊게 말이다. 최대한 신경 쓰며 회피하려고 한 부분이었지만, 한 집안에 두 이성이 있고 그 세계에만 빠져 있다면 서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걸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주가 끝나는 마지막 날 나는 이제 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샤워 중인 그녀가 나오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둘만의 낙원으로 떠나자고 말하기로 했다. 그 낙원은 우리 둘뿐이고 돈이나 교통편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짙은 김을 뿌리며 나오자, 바로 앞에 섰다. 처음 보는 나체였다. 왜 이번에는 속옷도 입지 않은 채로 나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저랑 같이 떠나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러자 그녀는 내 품에 안겼다. 옷 위로도 따뜻한 피부가 느껴졌다. 서로의 심장박동을 공유하며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공유된 심장박동은 늘어지지 않았다. 숨결이 느껴지고 피부가 맞닿을수록 빨라지기만 했다. 약간의 거리를 띄우려고 감은 팔을 풀자, 그녀가 다시 원래대로 위치 시켰다. 마치 무엇을 바라는 듯이 계속 그 자세로 기다렸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입을 맞추었다. 옷을 벗기 시작했고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북한과 아주 가까운 섬으로 떠났다. 그 섬에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에 일이 생기면 피난처로 사용하려고 둔 곳이기에 부족한 것은 없었다. 설령 부족한 게 있었다고 해도 우리 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로 행복한 낙원이었다.
컨테이너 세 개를 연결한 공간의 집이었다. 가끔 고라니와 멧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실상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곳이었다. 그렇다고 문명이 없는 사람처럼 옷을 벗고 다니거나 전기, 가스가 없지는 않았다.
음식과 물이 거의 바닥이 났을 때 사회로 돌아가 물건을 사와야 했다. 그녀는 나를 이제 영영 보지 못할 것처럼 껴안고 놔주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위험하다고 말렸다. 가장 큰 캐리어를 두 개 챙기고 보트를 탔다. 육지에 도착하고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마트에 들러 되도록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통조림과 간편식을 구매했다. 마트에서 나올 때 누군가가 나를 뒤쫓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확인해 봤지만, 아직 남은 직업병 중 하나라 생각하고 섬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가스로 인해 난방은 되었지만, 보온자재로 감싸져 있지는 않아서 아무리 보일러를 때워도 한기가 느껴졌다. 특히, 아침이 유독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정오가 되기 전까지 전기매트를 켜고 이불을 덮은 채 귤을 까먹으며 나오지 않았다.
정오가 되면 사회에 나가서 영화나 드라마를 담은 USB를 구형 컴퓨터에 꽂고 감상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가끔 컵라면이나 간편식의 신제품이 나오면 그걸 같이 먹는 것도 신기해하며 기대했다. 내가 장을 보러 가는 날이면 이제 그녀는 불안보다 새로운 문물을 기다리는 한 여인처럼 기대에 찬 웃음을 내보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혹여나 컨테이너 지붕이 가라앉을까 봐 세 시간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치웠다. 그때 그녀가 눈덩이를 나에게 하나 던졌다. 그때만큼은 영화 속의 사랑하는 연인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에 맞추어 지붕에 있는 눈을 모아 뭉친 다음 조심스럽게 던졌다. 그녀가 말을 건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보일러를 틀었더니 가스가 부족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 나가려는 찰나 그녀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이유는 단지 추운 곳에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속 여기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을 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했고 보트를 타고 육지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주유소에 내렸다. 가스를 사기 위해 그녀에게는 택시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가스를 사고 통을 끌고 오는 순간 택시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급하게 통을 바닥에 떨구고 달려갔다. 창문에는 피가 튀어있으며 축 늘어진 그녀를 두고 택시 기사가 급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무슨 선택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때 주유소 직원 중 한 명이 택시 기사를 뒤쫓아갔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봤다. 목에 깊은 자상 두 개와 폐를 세 번 찔렸다. 사실상 생존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택시에는 키가 꽂혀 있어 운전할 수 있었다. 급하게 병원을 찾아가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횡설수설한 설명보다 상태를 보여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그녀를 아무 병상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곧이어 의사가 달려오더니 그녀를 보자마자 간단한 진찰 후 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내 삶의 의지도 꺾여버렸다.
택시 기사는 몇 시간 가지 않아 잡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칼을 뒷주머니에 숨긴 채로 경찰서에 찾아갔다. 그와 눈이 맞는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게 그녀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못한 거 내가 한 것뿐이야.”
차갑게 다가가 그의 목이 칼을 찔러 넣었다. 빼는 순간 뜨거운 피가 솟구쳤고 내 얼굴과 목에 튀었다. 밖에 있었기에 나의 차가운 피부에 닿자마자 피는 급격하게 냉해졌다. 경찰은 총을 내게 들이밀고 구급차는 그를 싣고 병원으로 향했다. 칼을 떨어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내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이 마음을 후벼팠다. 애초에 행복한 세상은 비윤리적인 직업에서 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싶었다. 여태까지 지은 죄가 철퇴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