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만 홍수를 봤다.
텔레비전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기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맑음, 때때로 구름 조금.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거대한 물줄기가 도시를 집어삼키는 게.
아파트 단지가 잠기고
차들이 떠내려가고
사람들이 휩쓸려갔다.
나도 곧 잠길 것 같았다.
물은 이미 발목까지 차올랐으니까.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저기 봐."
또 다른 나는 손가락으로 가운데 섬 하나를 가리켰다.
홍수 속에 우뚝 솟은 모래섬.
물결이 아무리 거세도 잠기지 않는 섬.
"저기가 네 자리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어. 물이 너무 깊어."
또 다른 나는 빙그레 웃었다.
"넌 이미 거기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섬 위에 서 있었다.
신기했다.
아까까지 무서웠던 홍수가
이제는 그저 장관으로 보였다.
분노라는 물결이 도시를 덮치고
불안이라는 급류가 건물을 쓸어가고
후회라는 소용돌이가 나무들을 뽑아갔다.
하지만 나는 고요했다.
섬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회사 동료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좀 이상한데."
나는 대답했다.
"홍수 구경 중이야."
"무슨 홍수?"
"내 마음속 홍수."
동료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이제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가끔은 섬을 떠나기도 한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홍수와 함께 휩쓸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곧 자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 있는지.
그러면 다시 섬 위에 서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쓸려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이윽고 잠잠해진다.
오늘도 도시는 물에 잠긴다.
하지만 나는 잠기지 않는다.
모래섬 위에서
고요히
홍수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