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추억으로만 남기고 다시는 오지 말자~
전날 밤잠을 설쳐 피곤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수납 창구에서 접수를 하는데 “어머, 오늘 마지막 치료시네요. 고생하셨어요!”라고 생각지 못한 인사를 건네셨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는데 왠지 울컥. 이때부터 감격에 겨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3번 치료실. 선남선녀 방사 선생님들과 5주간 매일 만나던 곳이다. 마지막 치료. 방사 기계가 돌아가며 윙윙 소리가 나는데, 2~3분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곳은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어야지. 다시는 오면 안 돼. 그냥 추억으로만 간직하자.’
치료를 마치자 원래도 친절하신 선생님들이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따뜻하게 말씀해주셨다.
“치료받으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관리 잘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또 눈물이 울컥. 다행히 잘 참고 웃으며 감사했노라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길고 긴 치료의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건네진 인사는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친절하고 고마운 분들이지만 다시 만나지 않으면 더 좋은 인연. 감사함은 소중히 담아두고, 치료는 추억으로만 남기를.
수술, 항암, 방사. 유방암 표준치료 과정에서 의료진과 가장 많이 접하는 게 방사 치료인 것 같다. 시간은 짧지만 만남의 횟수가 잦으니까. 수술은 잠들었다 눈 뜨면 끝나 있고, 회진은 찰나. 항암은 주사 전 진료와 주사. 주사실은 전담 선생님이 아니라 차수마다 바뀌다 보니 항암 주사를 맞는 것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방사 치료는 거의 한 달 이상 매일 잠깐이라도 만나게 된다. 심지어 가운도 덮어주고, 일어날 때 등도 받쳐준다. 마치 치료를 잘 받도록 도와주는 런닝메이트 같았다. 한여름의 조금은 지루하고 힘든 치료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방사과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가슴의 파란 선들을 바라보았다. 땀과 물로 얼룩지고 너덜너덜해진 선들. 이제 깨끗이 지워낼 수 있으니 좋으면서도, 한 달간 함께해서인지 살짝 아쉽기도 하다. 빨갛게 붓고 딱딱해진 수술 부위, 전체적으로 검붉어진 가슴. 그래도 이만하길 참 다행이라 감사하다. 잘 견뎌준 나의 몸이 고맙다.
방사 치료도 부작용이 지속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치료 직후 한 달간 찜질방, 통목욕, 수영장, 반신욕, 치료 부위를 강하게 자극(때밀기)하는 건 금지. 임파 부종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잘 때는 심장보다 팔을 높게 두면 좋다. 옆구리 통증도 있던 터라 한동안 작은 쿠션에 팔을 올리고 잤다. 단단해진 치료 부위는 약 6개월에서 1년간 지속된다.
방사선 치료도 조사량이 일정량(5천라드)을 넘으면 보험 조건에 따라 수술에 해당이 되어 수술비가 지급된다. 혹시나 해서 방사선 치료 기록지를 발급 받았는데, 이런. 누적조사량이 무려 6천라드였다. 주위에 대부분 5천 언저리던데, 나만 피폭을 더 많이 당한 듯해 살짝 서럽지만, 덕분에(?) 수술비를 지급받았다. 이렇듯 방사선 치료 횟수와 총조사량이 비례하지는 않는다. 횟수가 많다고 겁먹지 않아도 된다. 주의사항을 안내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마지막 치료인데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신다.
요양병원으로 돌아오니 데스크 간호사 선생님들이 박수를 쳐주신다. 촐랑거리며 여기저기 소문을 낸 효과인가. 그래도 축하하고 기뻐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남편과 엄마에게도 막방 소식을 알렸다. 나의 빈자리에 힘들었을 텐데도, 오히려 이제 한시름 놓았으니 푹 쉬면서 회복에만 신경을 쓰란다. 아픈 뒤로 깨닫게 된 가족의 사랑.
축하의 피날레는 룸메이트 언니가 준비해준 파티. 수제 치즈케이크에 ‘꽃길만 걸어요’라고 쓴 멋진 캘리그래피 엽서까지. 친언니처럼 나를 보살펴 준 간호사 샘을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생면부지의 남이었는데, 내 인생의 작은 이벤트를 이렇게 챙겨준다. 암환자로서 느끼는 감정과 몸 상태의 변화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몸소 겪어서 아는 3년 선배 언니와 곁에서 보고 경험한 선생님. 그렇게 셋이서 함께 눈물을 훌쩍이며 울고 웃었다.
자기 전에 샤워를 하러 들어가서 깨달았다. 이제 파란 선을 씻어도 된다는 걸. 더 이상 머리를 숙이고 감지 않아도 된다는 걸. 한 달여 만에 마음 놓고 뜨거운 물을 듬뿍 맞으며 하는 샤워. 따뜻한 물로 마음 편하게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이던지. 치료 부위의 피부는 조심스러워서 세게 닦지 않았더니 한 번에 지워지지 않았다. 괜찮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한 달을 함께 했으니 아쉬워서 작별의 시간을 갖는 셈 치면 된다.
온종일 눈가가 젖고, 훌쩍거린 하루.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도 아닌데 괜히 혼자 주책이라고 겸연쩍어하는 나에게 이웃님이 따뜻한 글을 남겨주셨다. ‘금메달보다 값진 다이아메달’을 딴 거라고.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니까. 하루쯤은 내 마음 가는 대로 웃어도 좋고, 울어도 좋은 거다.
방사 치료는 끝났지만 이미 시작된 호르몬 치료인 주사와 약은 앞으로 5년. 당분간은 재활치료도 받아야 한다. 정기적으로 검진도 받아야 하고 나의 치료는 계속된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마침표를 찍고, 숨 한 번 돌리고 에너지를 얻었으니 또다시 힘차게 화이팅!
* 이 글은 22년 출간된 <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