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해요! 나는 깨끗해요~ 앗싸!
암 치료 후 정기 검진.
이 말의 무게감을 몸소 체험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시어머님의 정기 검진 때 “다 괜찮으실 거예요. 화이팅!”이라고 해맑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건만 지금 생각하니 민망하다. 간간히 들려오는 주변 언니들의 검진 소식 때도 괜찮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는데 막상 정기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이성과 본성이 유체 이탈된 듯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나름 멘탈 갑이라고 자부했건만 갑은 무슨. 또 이렇게 나의 실체를 인지하게 된다.
괜찮을 거라 수없이 되새겼건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 ‘만에 하나’. 혹시나 다시 급반전의 드라마를 맞게 되면 혼자 운전하고 돌아오기가 서러울 것 같다. 고민 끝에 보기에는 나보다 더 환자 같은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허벅지 안쪽에 생긴 피지낭종을 째서 치료하는 바람에 온전히 걷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내 어깨에 살짝 기댄 남편. 진료실로 향하는 길, 찐 유병자 부부를 인증하는 우리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무얼 해도 왠지 어설픈 남편이 또 이렇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의 걸음걸이에 신경 쓰랴, 웃음을 참느라 긴장을 느낄 새가 없다. 남편은 내 마음을 다 안다고 말은 하는데, 글쎄...
하긴 겪어 보지 않은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도, 그 기대에 못 미친다고 서운해할 일도 아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고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진료 대기 1시간. 이쯤이야 이제는 익숙한 중견 환자. 1년 검진은 검사 결과만 보는 줄 알았는데, 입는 순간 아파 보이는 마법의 핑크가운을 입으란다. 진료 베드에 누워 대기하는 짧은 시간, 옆 진료실의 대화가 들린다.
“잘 지내시고, 6개월 후에 뵙겠습니다.”
아, 저분도 정기검진이시구나. 나도 듣고 싶다. 곧 담당 교수님이 들어오고, 이름을 확인한다. 짤깍짤깍 마우스 소리. 두근두근
“깨끗하네요!”
아! ‘깨끗’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강력한 힘이 있는지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바로 긴장이 풀리며 무장해제가 되었다. 이어진 촉진, 1년 후 검사 통보를 받고 정신없이 진료실을 나섰다. 경황없이 훅 지나갔지만, 그래도 감격스러운 ‘1년 검진 패스’.
다만 다음 혈액종양내과 진료를 기다리다 보니 검진 항목이 유방외과와 혈종내과로 나누어진 게 생각났다. 유방외과에서는 엑스레이와 초음파, 즉 가슴 위주로 보고, 혈종내과에서는 뼈검사, CT, 혈액검사로 기타 장기전이 여부와 종양표지자 수치까지 전반적으로 확인했다. 즉, 찐 담임샘인 혈종과 교수님의 최종 승인을 득해야 진짜 완료.
“표지자도 좋고, 간수치도 좋고, CT, 뼈검사 전부 깨끗해요. 우리는 6개월 후에 봐요.”
진짜 패스다. ‘현재 이상 무!’ 확인받았다. 실은 병원을 나서면서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검사부터 결과를 듣기까지 긴장했던 시간이 훅 스쳐 간다. 강하지만 찬 기운이 사라진 봄바람, 탄천에 비친 따스한 햇볕, 노란 개나리, 소담스럽게 꽃망울이 맺힌 목련이 그제야 보였다. 6개월이라는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정기 검진 전후로 흐느적거리는 몸과 마음을 핑계로 미뤄두었던 일들이 슬금슬금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제는 비겁한 변명도, 베베 꼬인 자기 합리화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마구 솟아난다. 너무 바쁘게 살 필요도 없지만, 또 지나치게 몸 사리며 방어적으로 살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하고 싶다. 때로는 예전처럼 무언가에 온 힘을 다 쏟아부을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울 수도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고, 적절히 조절하면서. 선물 같은 6개월의 시간을 의미 있게, 소중하게 보내고 싶다.
얼마 전 우연히 하반기에 개봉 예정인 <장화 신은 고양이2> 영상을 보았다. 9개의 목숨을 갖고 있던 고양이가 흥청망청 죽고 살기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마지막 목숨에 이른 것이다. 그간의 방탕한 삶을 반성해보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 유일한 선택은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고, 이를 위해 위험천만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재미있게 웃자고 보는 애니메이션인데 이렇게 또 감정이입이 되고 만다. 마지막 남은 목숨이라면, 모든 순간이 얼마나 소중할지. 9번째 삶을 소중히 살아가려는 주인공처럼, 나도 좀 더 진중하게, 즐겁게 살아야겠다.
원치 않았지만 찍게 된 나의 투병 드라마. 비록 가슴 졸이는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 밋밋해도, 평범하고 희망으로 가득 찬 드라마 2막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이 책은 22년 출간된 <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