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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Dec 31. 2024

올해의 마지막 날, 1학년 교실에서는

2024년 12월 31일의 기록


올해의 마지막 날, 교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한 해가 간다는 걸 알고 있나 봅니다. 아이들은 12월 31일이 적힌 칠판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선생님 2학년이 되기 싫어요.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구구단도 외워야 하잖아요."


"선생님 내년에도 1학년 교실에 계시면 쉬는 시간에 찾아가도 되죠? 선생님이 그냥 2학년 선생님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들을 하더니 이번에는 씩씩한 아이 하나가 교실 앞으로 나와 큰 절을 하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교실 바닥에서 큰 절은 한 아이를 뒤이어 줄줄이 아이들이 나옵니다. 저는 급식을 먹다 말고 졸지에 큰절 세례를 받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1월 1일에는 세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요. 진짜 세뱃돈 받는 설은 1월 29일이라는 걸요. 그래도 큰 절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요.


아이고. 뭐 잘한 것도 없는데 아이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는 걸까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그동안 1학년 힘들다고 투덜대기도 많이 했고 지각도 많이 했는데 이런 선생님에게 복을 퍼주는 아이들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선생님 내년에도 학교에 있어. 어디 안 가."라고 웃으며 말했을 텐데. 올해는 진짜 어디에 가니까. 학교에 남지 않을 테니까. 나의 교직생활이 여기에서 끝이니까. 자꾸 울음이 납니다.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가고 빈 교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빈 교실을 마주 봅니다.


'무엇이 나를 여기 학교에 있게 한 걸까?'


혼자서 생각에 잠깁니다. 빈 교실 책상 어딘가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학교에 있던 '나'. 6년이라는 시간을 초등학교에 다녔던 촌스럽고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아이.


그때 그 아이가 마치 교실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차마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를 기억하려고 해마다 3월이면 아이들은 만나고 급식을 먹고 교과서를 읽었나 봅니다.


그렇게 저는 어느새 내가 만났던 6명의 선생님 중에 하나가 되어있고, 그 아이는 내가 가르친 수많은 아이 중에 하나가 되어서 우리는 교실에서 다시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에게 잘 가라고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어떤 말이 듣고 싶었을까요?




정말 괜찮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완벽한 선생님을 꿈꾸는 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아마 더 오랫동안 교직에 머물더라도 매일 후회하고 다짐하는 삶의 연속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를 떠나보내는 일은 어린 시절의 나와 작별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나와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나버린 과거를 과거로 놓아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태까지 나를 붙잡고 있던 교실의 추억과 잔상들이 노란 나비가 되어 날개를 여닫고 있습니다.


나에게 참 좋았던 곳. 힘들기도 했지만 결국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


초등학교. 그 작은 의자와 책상이 있는 교실.





12월 마지막 날을 교실에서 보내며 어린 에게 인사를 합니다.



안녕. 네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난 선생님이 되었어. 네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참 좋아했겠지? 지금의 나는 네가 잘 기억나지는 않아. 넌 어떤 아이 었을까? 가끔 생각해 보지만 어렴풋한 느낌뿐이야.


널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학교에 있었다는 걸 알아. 학교는 너의 전부였고 학교는 너의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넌 항상 네가 해낸 것들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지. 아니야. 그건 별거 아닌 것들이 아니야. 네가 했던 노력들을 정말 대단하게 생각해.


넌 잘하고 있어. 너의 어설픈 도전이, 때로는 좌절했던 경험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울며 버틸 때도 넌 최선을 다 했잖아.


너의 마음을 내가 알고 있어. 고마워. 잘 버텨줘서.


이제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으러 갈 거야.

언제든 만나러 올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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