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놓아주는 특별한 방법
제주 이사를 준비하며 기존에 쓰던 식기 세척기가 남게 되었다. 이번에야 말로 엄마 집에 식세기를 놓아줄 때다!
엄마는 꽃 같은 21살에 아빠와 결혼한 후 시댁에 들어와 3남매를 낳고 여태까지 그 집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8살 때 지은 집.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부엌에서 살림을 했다.
엄마의 살림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됐다.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집은 설날, 추석 빼고 1년에 12번 제사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강력한 유교식 전통을 이어가는 분이셨다.
설날과 추석에는 6명의 작은할아버지들이 우르르 우리 집에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가곤 했다. 그 모든 제기와, 음식과, 떡, 만두 같은 것이 우리 집 주방에서 마법처럼 나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작은 할아버지들은 더는 우리 집에 오시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설 추석이 되면 아빠의 형제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시골집의 모습이 된다.
지난 설에도 일부로 연휴를 피해서 집에 다녀갔다. 우리까지 가게 되면 열서너 명이 되는 가족들이 시끌벅적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당연히 우리 엄마가 해야 할 때가 많다.
싱크대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를 보면 이게 끝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또 고모랑 도와가며 하다 보면 생각보다는 금방 끝나기도 한다.
그래, 식세기를 놓자!
하지만 식세기를 놓으려고 보니, 26년 전 싱크대는 규격장도 아니고 심지어는 문짝이 하나 뚝 떨어져 있다. 부엌 타일도 26년 전에 시공한 그대로이다.
싱크대 전체를 바꾸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이 말을 건넸을 때, 돌아온 대답은
"그래,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하자."
엄마 아빠에게 뭘 이야기했을 때, '좋아 그렇게 하자.' 한 번에 오케이를 받은 적이 없다.
'나중에, 지금은 사정이 안되니까.' 이런 대답을 너무나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싱크대 업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견적이라도 보자 그럼!"
엄마의 지인인 동네 아저씨는 싱크대를 가는데 500~600만 원이라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했고, 엄마 아빠는 그 가격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싱크대 업체를 무작정 검색해서 집 가까운 곳으로 연락을 했다. 블로그에 글도 올리는 전문적인 업체라는 느낌이 들어 바로 견적 신청을 했다.
견적 신청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그다음은 싱크대 아저씨와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는 가장 기본 일자 싱크대만 생각했었는데, 옆에 있던 가스레인지와 후드까지 포함해서 기억자로 싱크대 견적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부엌을 바꾸게 되면 마지막일 텐데, 한 번에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된 싱크대 공사는 26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이틀 만에 끝이 났다. 하루는 철거와 타일작업을 하고 다른 하루는 싱크대를 설치한 것이다.
싱크대 깊숙이 들어있던 그릇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다. 싱크대가 있던 자리는 귀신이나 나올 듯 흉흉하기 짝이 없었지만 결국 새로운 부엌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 부엌 리모델링이 순전히 엄마를 위한 일있은 줄 알았다. 그런데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가 알게 되었다.
부엌은 엄마만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부엌에 담긴 기억들이 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싱크대에서 쌓아 올린 기억들. 그 기억들은 싱크대에 켜켜이 내려앉아서 우리 집의 분위기가 되었다.
해묵은 기억과 분위기는 때로는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그 집에 사는 당사자들은 그것을 거의 '운명'처럼 느끼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이 어디 있겠는가? 이틀이면 새로운 싱크대를 달 수 있다.
부엌에서 찌개를 끓이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던 생각이 난다. 새벽에는 꼭 앉은뱅이 밥상에서 공부를 했었다.
더 어린 시절 새참을 만들어 머리에 지고 나르던 엄마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설날이면 모두 모여 앉아 설날에 먹을 만두를 끊임없이 빚어냈었다.
하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그 부엌에서 아빠가 먹었던 술. 술주정. 물건이 떨어지던 기억들이다.
아빠는 술을 끊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귀신처럼 들러붙어 있는 기억이다. 그 걸 통째로 들어낸다고 생각하니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엄마도 할머니도 너무나 좋아하는 새로운 부엌.
어제는 아빠에게도 문자가 왔다. 아빠는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해주기라도 한 듯 수줍은 문자를 보냈다.
딸, 주방을 예쁘게 해 주어서 고마워.
짧은 문자이지만 그걸로 되었다. 아빠도 과거를 놔주고 싶었겠지. 이제 새로운 부엌에서 더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 사진: Unsplash의Gareth Hubb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