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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Mar 15. 2023

지금 당장 전화해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

     

집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SNS를 열심히 하게 됐어. 주변 사람과 직접 만나는 건 이 시기엔 거의 불가능했거든. 아기의 수유텀 때문에 다른 아기 엄마와 시간을 맞춰서 볼 수 없었고 주변에는 집에 놀러 와 수다를 떨어줄 친구 하나 없었어.


좋아하는 가수 제이레빗의 정혜선이 나보다 조금 이르게 아기를 낳았고 유튜버 올리버쌤은 한 달 정도 늦게 딸 체리를 맞이했어. 그 사람들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주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어. 같은 또래의 아기를 기르는 엄마 아빠들이 어떻게 사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한국인인 올리버쌤 부인은 미국에서 아기를 낳고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에 올 기회가 없었어. 하지만 미국 할머니는 집 근처에 살아서 금방 커버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할머니 댁에 자주 찾아갔지. 그 동영상을 보면서 왜 시어머니와 연락이 끊기고 만 건지 비로소 생각하게 됐어.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백일잔치를 준비하면서 알게 됐어. 백일을 앞두고 용기 내 어머님께 연락했어. 다른 날도 아니고 ‘백일’이니까.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님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하셨어. 그리고 진짜로, 오지 않으셨지.


도대체 첫 손주의 백일보다 중요한 일정이 뭘까. 그때 비로소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근무를 위해 이라크로 돌아가신 아버님은 참석할 수가 없었고 어머님은 다른 일정으로 오시지 않아서 백일잔치에는 친정 식구들만 왔어.


백일잔치가 끝난 뒤에도 나는 미적지근하게 버텼어. 갈등의 골을 애써 무시하면서 눈앞에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일거리를 해냈지.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고름은 신랑에게서 터졌어. 어머님은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았지만 신랑과는 퇴근길에 자주 전화를 했거든. 나에 대한 모든 불만이 신랑에게 가서 꽂히는 것 같았어. 어느 날은 신랑이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왔어.


“여보 임신했을 때 엄마 아빠가 집에 오신 적 있지?”     


그 말을 듣고 아차 싶었어. 어머님은 아버님이 이라크에서 오셨을 때 우리 집에 찾아왔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계셨던 거야. 그 일은 며느리가 시댁 어른들을 현관에서 ‘문전 박대한’ 사건이 되어있었어. 6개월 전 그날을 다시 머릿속으로 생각했어. 그렇게 해석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왜냐하면 그날 갑작스럽게 먼저 연락했던 건 어머님이었고, 어머님은 ‘물건만 주고 바로 간다.’고 하셨거든.


신랑은 코로나 상황에 임산부였던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한 모양이었어. 자기 배로 낳은 소중한 자식이 부인 편을 들고 있으니 복장이 터지셨을 거야. 신랑은 왜 자기를 중간에 놓고 그러는 거냐며 둘 사이의 일은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소리쳤어. 집에서 멀쩡하게 아기를 보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말문이 막혔지. 하지만 이제 와서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문제의 열쇠는 뜻밖에도 중학교 친구 보라가 가지고 있었어.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큰 힘이 되어주었던 보라는 아기를 낳은 뒤에도 잘 지내고 있는지 가끔 연락해서 안부를 물었어.


유모차 바퀴를 굴리는 오후나 목욕물을 받는 해 질 무렵이면 종종 보라 생각이 났어. 20대에 아이를 키우며 겪었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까. 다른 친구들은 연애하고 놀기 바쁠 때 집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저귀를 치우며 몸도 마음도 지쳐갔을 거야.


그 시절의 나는 보라에게 자주 연락하지 않았어. 보라는 너무 먼 곳에 있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거든. 보라는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걸으며 친정엄마가 속상할까 봐 투정도 부리지 못했대.


아기를 낳기 전까지 ‘육아가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어. 혼자서도 충분히 아기 둘 정도는 키워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하지만 하나 낳아서 키우는데도 몸과 마음의 기력을 다 빨려가고 있었어.      




보라와 전화로 이야기하던 중 시댁과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 보라는 나에게 뜬금없이 시댁과는 잘 지내냐고 물었어. 나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연락이 끊긴 지 좀 됐다고 사실대로 털어놨지.      


“지금 너 나랑 전화할 때가 아냐. 바로 시어머니한테 연락해!”     


 할 말도 없고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보라는 단호했어. 어른이 먼저 전화를 할 수는 없으니 무조건 먼저 연락해야 한다는 거야. 아니면 남편도 너무 힘들 거라고. 조금이라도 일찍 관계를 회복하는 게 백번 맞다고 했어. 보라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 계속해서 말했어.      


“바로 전화해! 바로!”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연락처를 열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어. 통화연결음은 가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어. 머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지. 통화 연결음이 멈추고 통화 시간이 떴어.


“여보세요.”


어머님이 전화를 받았어.      




무슨 말로 입을 열었는지 그리고 이어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어. 제가 일부로 이렇게 망쳐버리려던 건 아니에요. 죄송해요. 전화를 걸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횡설수설하면서 말을 이었어. 문전 박대한 사건에 대해 말해보려고 했지만 시어머니는 이미 다 지난 일이니, 신경 쓸 거 없다고 하셨어. 그리고 괜찮다고 하셨지. 나는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말했어. 친구에 대해서도.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전화를 못 했을 거라고.


그렇게 전화를 했다고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진 건 아니야.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남아서 야금야금 우리를 힘들게 했어. 신랑도 엄마와 아내 사이를 완전히 믿는데 시간에 좀 걸렸지. 하지만 그 이후 우리는 서로 연락하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고 관계는 조금씩 나아졌어. 어쨌든 어머님은 내가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나에게 시어머니란, 오랫동안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어떤 역할처럼 생각됐어. 진짜 그분의 성격과 성향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마 나도 그랬을 거야. 초등학교 교사인 며느리의 참한 이미지가 있잖아. 나는 그 이미지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었을까.


어머님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직장생활을 했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육아는 외할머니가 담당했어. 어머님은 집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일하는 걸 좋아하는 분이셨지. 그리고 해외 근무하는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어.


7년 만에 가진 둘째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도 아버님은 해외에 있었어. 남편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걸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아버님은 아기가 태어난 뒤 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대. 그 시간을 모두 혼자서 겪어낸 거야. 아무리 강철 같은 사람이라도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 그때 참 많이 울었다고도 하셨어.


더 많이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항상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 어렵다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붙어서 지역협회장까지 했던 엄마. 손주가 생기자 방통대 아교육과를 지원하는 할머니가 바로 우리 어머님이야. 시골에서 내가 봐왔던 할머니와는 사뭇 다른 화려한 도시의 워킹 할머니야.      


*사진: UnsplashOscar N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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