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의 전북현대는 만나는 팀마다 고전을 면치 못 하는 천하무적의 팀이 되어 있었다.
과거 최강희 감독님 시절부터 만들어진 '닥공'이라는 이름의 공격축구로 10년 동안 7번의 리그 우승과 1번의 ACL(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그리고 뒤이은 외국인 감독의 더블 달성으로 FA컵 우승까지도 이룬 바가 있는 팀이 되면서 흔한 말로 '전북천하'의 시대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영광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날들을 보내면서도 팬들이 진짜 열광했던 건 물론 좋은 성적도 한몫했겠지만, 흔한 말로 전북다운 '재밌는 공격 축구'였다. 이기고 있어도 질 것 같은 축구가 아니라, 지고 있어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축구 말이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는 분위기의 날들이 시즌의 시작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개막전의 얼토당토않은 경기력으로 그다음 주 홈경기의 관중은 반토막이 났으며, 모든 팀들이 다 부러워하는 선수단을 가지고 3년째 같은 축구를 하는 팀을 향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등까지 돌렸다.
3라운드 경기를 꾸역꾸역 이기긴 했지만, 개선되지 않는 경기력으로 이젠 더 이상 승패조차 중요하지 않은 팬들의 인내심은 한계치에 다다랐고, 그 인내심을 붙잡을 중요한 분기점이 될 4라운드 대구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4라운드가 끝나고 나면 2주 간의 A매치 휴식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지금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선 변화가 반드시 필요했으며, 더욱이 팬들은 이 한 경기의 내용과 결과에 따라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원정석의 좌석수가 가장 적기로 유명한 'DGB 대구은행파크'의 피켓팅에서 원하는 좌석을 선점한 뒤, 복잡한 마음을 이끌고 원정버스에 올랐다. 일찍 도착한 원정버스 덕에 입장하기 전, 생맥주와 닭강정을 먹으며 지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고, 지나가는 대구팬의 등짝에 새겨진 세징야의 마킹을 보고는 진짜 경기장에 동상 하나 세워야 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까지도 했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지..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바뀌면서 처음 소집된 대표팀 명단에 전북 소속의 선수들이 다섯 명이나 뽑혔다.
그런 기대 때문인지 클린스만 감독이 직접 대구의 경기장을 찾았고, 오늘의 경기에서 전북다운 경기를 잘 보여줘야 할 이유는 이걸로도 이미 충분했다.
하지만 경기시작 10분 만에 대구에게 예상치 못 한 선제 실점을 허용하면서 경기를 끌려가기 시작하더니, 이후 몇 차례의 공격 기회조차 번번이 대구의 수비에 막히면서 이렇다 할 전환점 또한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골 차이로 끌려가면서 전반전은 마무리가 됐기에 이어질 후반전에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분위기 반전이 되기를 기대했었다. 벼랑 끝에 서있는 것만 같던 우리들의 목소리로 응원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초조한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후반전엔 꼭 '전북다운' 축구가 필요한 우리들이었는데..
이어진 후반전에 선수 교체를 통한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축구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이렇게 끝나도 한바탕 난리가 나겠다 싶던 후반 추가시간, 대구 세징야의 쐐기골에 처참했던 경기는 결국 0:2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 들게 됐다.
(세징야 동상을 만든다고 하면 만 원은 보태야지 했었는데.. 안 보탤 거야......)
홈경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원정경기가 있는 날이면 팬들은 하루 종일의 내 모든 것을 오로지 축구를 위해서만 쓴다. 왕복의 이동시간을 길 위에 쓰고, 내 돈을 들여 원정티켓을 끊으며, 내 돈을 들여 원정버스를 탄다.
그리고 그날의 축구로 남은 일주일을 다시 사는 게 팬들이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원정석에 모인 수많은 팬들은 우리 팀 하나만 보고 전주 혹은 각자가 사는 곳에서 대구까지 왔을 테고, 오늘의 경기 내용과 결과가 마음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우리의 자리를 지키며 박수를 보냈다. 허망한 경기 결과에 선수단은 경기 종료 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원정팬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런 모습들 뒤에서 걸어오던 우리의 주장이 고개를 돌려 그대로 들어가 버릴 땐 끝까지 지켜보던 팬들의 박수마저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날의 경기로 팬들의 인내심은 폭발하고 말았다..
전북현대의 서포터스인 MGB(Mad Green Boys)에서는 응원 행위 중단에 대한 입장을 공식발표했으며, 다수의 팬들 또한 동참의 의지를 내비쳤다.
나에게 4월은 이야기가 많은 달이다.
4월의 첫날,
포항과의 홈경기가 펼쳐지던 전주성(전주월드컵경기장),
응원석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니, 그러는 줄 알았다)
보이콧을 가장한 행패처럼 보이던 일련의 행동에서부터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하더니, 우리 선수의 선제골에도 계속되던 그 잡다함에 나는 더 이상 응원석 한가운데에 있을 수가 없어 경기장을 뛰쳐나왔다.
최악을 상상했지만 그보다도 더 참기 어려웠던 4월의 첫날,
우리의 잔혹동화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