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다음 달 까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내가 참고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음을 나도 알고 있기에 일단 옷을 차려입고 무작정 집을 나와 거래처 직원들에게 다시 전화를 해본다.
역시 소문이 다 돌아서인지 내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몇 시간을 배회했을까.
한 사무실 앞에 '라이더 모집'이란 구인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면허 소지자에 나이 또한 모집 대상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저.. 밖에 구인광고 보고 들어왔습니다."
다들 바쁜지 눈길 한번 주고 전화받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때 한 중년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지금 좀 바쁘니깐 한 시간 뒤에 다시 오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 때라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사무실을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일찍 돌아가셨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무렵 늦음 밤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난 하얀 천으로 덮여 누워 있던 누군가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낯선 환경, 역한 병원 냄새, 몰려오는 두려움, 그날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집으로 오지 못할 것이란 걸 어린 나이였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촉망받던 양복점 재단사였고, 내가 살던 고장에서 손안에 꼽히는 기술자였기에 우리 살림은 넉넉했었다. 심지어 남들 집에 없던 컬러 TV도 있었기에 '전설의 고향'을 보러 우리 집으로 몰려오기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파출부, 식당 등을 다니며 온갖 갖은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중학교 입학할 무렵 외삼촌의 도움으로 관공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채용될 수 있었는데 도지사 공관으로 들어가 그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일하게 된다. 도지사와 그의 가족을 위한 식모라지만 그 가족들과 얼굴 맞대는 관계이기에 고위 공무원들도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였다. 이때부터 가난에 허덕이 던 우리 집 사정도 점차 안정화되며 나 또한 본격적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않고 열리는 행사와 그들의 살림살이를 함께 챙겨야 했기에 자정이 다되어 들어올 때가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엄마는 불평한마디 없이 일하시며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우리에게도 운이 따랐는지 그가 재선 되며 어머니 또한 그 자리를 지키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가 퇴임할 때 우리도 그곳을 나와야 했는데 뜻하지 않게 그들로부터 새 아파트 한 채를 받게 된다. 그만 큼 엄마의 헌신은 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 준 것임에는 분명했다. 오래도록 공관 내에 마련된 허름한 창고방에 살던 우리 모자로선 새집으로 이사 갈 때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가던 첫날 채워지지 않은 널따란 거실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게 안정화된 삶 속에 나 또한 내가 원하던 미대에 진학하게 된다.
내가 스물다섯이란 비교적 늦은 나이 군대를 제대할 무렵 어머니는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복학을 고민했었지만 어머니의 도움을 더 이상 받을 수도 없었고 나 또한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기에 사업이란 길을 선택하게 되며, 군대에서 야심 차게 준비했던 피씨 카페 사업과 컴퓨터 조립 사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된다.
피씨 카페는 내가 사는 지역 대학가에 한 두 개 있을까 할 정도로 드물었고, 내가 한 군데 오픈하고 일 년 뒤엔 너도나도 이 사업에 달려들어 지금의 피시방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아울러 컴퓨터 조립사업 또한 피씨 카페에서 피시방으로 확대되며 급물살을 타게 되고, 사업 일 년 만에 원금은 모두 회수하며 내 수중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당시 지역 신문사에 신세대 청년 사업가로 소개되며, 다양한 사업 제안을 받지만 내 몸 돌보기도 바쁘다고 대부분 거절하는데 실제 이 당시 피씨 카페에서 피시방으로 두 군데를 더 확장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이 내 눈으로 내손으로 보아야 안심되고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기에 몸이 한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사무실이나 매장에서 쪽잠자는 날들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한 이 년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 개의 점포와 용산 컴퓨터 매장을 돌보며 몸은 몸대로 상해 있었다. 이대로 몇 개월 더 버티다간 죽을 수 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거울 앞에 내 모습을 본 순간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주위에선 다들 만류했지만 너무도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죽음이란 단어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호황을 누리던 상황이었기에 후임자도 바로 나서며 한 달도 채 안 돼 조여 오는 듯한 올가미에서 빠져 올 수 있었다.
통장에는 오억 원이 좀 넘는 돈이 있었다. 당분간은 먹고살 수 있을 거란 생각과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기에 최소한 일 년은 휴식을 가지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난 엄마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해외여행도 다녀오게 되고 틈나는 대로 외식을 함께 하며 삶의 또 다른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난 이 휴식 기간 중 평상시 심취해 있었던 메탈 음악을 함께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스트리밍 서버를 운영하게 된다. 당연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부족했었고 MP3파일이 무분별하게 공유되던 시절이라 법적 저촉을 받지 않았다. 주로 헤비메탈과 록 음악을 위주로 서비스하였고 당시 구하기 힘든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음반들도 소개해가며 마니아들을 끓어 모으고 있었다. 아울러 이십 대 초반부터 틈틈틈이 공부해오던 C언어와 JAVA프로그래밍을 십분 활용해 운영하던 음악 사이트에 10명 내외로 동시 채팅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홈페이지 삽입하며 운영 반년 만에 나름 인지도 있는 음악 서비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어느새 내 방은 호스팅 업체 서버룸과도 비슷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 벤처기업에서 자신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내 기술을 활용하고 싶다며 입사 제안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