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바다 Sep 22. 2024

돌고 도는 인생의 회전목마

인연의 실타래

캐리어에 천천히 짐을 싸고

길버트 부부의 차에 올라 코벤트 가든으로 향한다.


-

혹시 그 금발머리 여자도 없으면 어떡하지 했던 건 다행히 기우였다.

화가는 캠핑용 의자에 앉아서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N은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그림을 샀던 그 사람인데

기억하냐고 물으니

금발머리의 그녀는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N을 반겼다.


N은 급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여기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부르던 그 싱어송라이터 남자의 행방을 아느냐고.

그때 당신의 그림을 사고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눈 후 함께 템스강으로 동행했는데

우리를 보았냐고.

우리가 함께 강물에 빠져버렸는데

나는 구해졌고

그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런데

금발머리의 그녀는 N에게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어떤 포인트에 이미 사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N에게 오히려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The singer you mentioned...

~~~  used to sing that song... A long time ago.... 10 years ago!

He died... ~~~ suicide in the Thames.   ~~~~ my twentieth birthday.

I remember it clearly  ~~~

It was 1999.  ~~~ Twenty years ago.

There's no singer singing in Covent Garden~~~

And the day you bought my painting...

There was never a singer like that.

What the hell ~~~?"


N은 그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빠르게 쏟아내는 그 이야기를

전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정확하게 발음해 주는 그 억양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N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듯 보였다.


그는 10년 전 죽은 사람이었다.

템스강에서 자살한 남자.

그녀가 그를 자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1999년 그녀의 생일에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코벤트 가든의 싱어송라이터였다.  


N은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금발머리 화가가 동양인 여자를 무시해서 그림을 팔아먹고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고

거짓말을 하며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이 세계의 실제 이야기임을.. N의 영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마켓의 상인에게도 달려가 갈색 머리의 그 남자에 대해 물었지만

모두가 N에게 다 같이 거짓말을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한결같이 모르거나 혹은 화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정확히 1999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코벤트 가든에서 노래를 하는 멋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었다.


그런데 런던에 오랜만에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던 청명한 날.

그는 어떤 예고편도 징조도 없이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며칠 간의 수색 후에야 강물에 온몸이 퉁퉁 불고 물고기가 눈알을 파먹은 흉측한 시체 하나가

떠올랐다.  

코벤트 가든의 상인과 그의 노래를 사랑했던 런던의 몇 사람들은 저마다

그가 노래하던 곳으로 찾아와 하얀 꽃을 놓고 눈물을 흘리며 추모했다.

그 누구도 그 남자가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던 불행의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아였기 때문이다.


-


이미 10년 전 죽었다는 그 남자.

N이 그를 만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렇다면 잠시 1999년으로 돌아갔던 것일까.

이 모든 세계의 중첩들이 N의 눈앞에 자꾸만 드러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템스강 아래로 가라앉으며 주마등처럼 떠올랐던 1500년대 타이타닉 침몰 당시의 장면이

다시 N에게 뭔가를 알려준 것일까.

타이타닉 배가 두 동강 나던 그 세계에서

N이 엄마의 선택을 바꾼 일.

그 얼음장 같은 바다에 빠져 죽어야 했던 그 남자 - 잭을 구해준 일.

그걸로 호통을 치던 달빛 도사.


그와 함께 템스강 다리에 서있을 때.

죽을 각오로 함께 빠져서 더 빨리 목격자들이 신고하도록 하겠다는

너무나 무모한 계획으로

N은 함께 뛰어들었지만

분명 살아 숨 쉬며 대화를 나누던 그와 뛰어들었지만  

그는 이 세계에 없는 존재였다.

아니, 만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죽은 시체가 되어 물에 가라앉던

그의 얼굴은 분명 달빛 도사였다.


차가운 강물에 익사해서 이미 창백해진 피부와 시퍼레진 입술.

다시 뜨지 않을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던... 검은 도포를 입은 달빛 도사.

여느 때처럼 무심하고 능청스럽게 N의 앞에 짠! 하고 등장해

놀라운 도술을 부리며 N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거대한 세계를 움직이고 바꾸도록 만들어 준 존재.

그 위대하고 특별한 존재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누구일까.


본능이 잊어버린 무의식 속에 감춰둔 장면을 들춰내어 알려주듯이

N은 문득 한국에 있는 자신의 오래된 일기장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써온,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N의 친구이자 위로이자 내면세계가

모두 담겨있는 일기장이었다.


-



10살이 된 소녀 N이 살던 시간.

아파트 화단에 만개한 금목서 향기가 민들레 꽃씨처럼 바람을 타고 퍼지던 날.

그 꽃을 다 꺾어서 향기를 간직하려다 실패해 울상이 되려던 날.  

처음 나타난 신비한 존재 - N의 운명을 구원하고 치유해 줄 달빛 도사를 만난 그 세계.

사실 N은 아빠의 발에 밟혀 죽은 그 가녀리고 노란 병아리를 묻어둔 곳에서

어느 날 나타난 그 나무가 실은 죽은 병아리가 나무가 되어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렇게 N에게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하고 상상했었다.

정확히 1999년이었다.

10살의 소녀 N이 달빛도사를 처음 만난 그 해에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 런던에 살고 있던 코벤트 가든의 그 남자는

템스강에 뛰어들어 죽은 직후였다.


'그가..  달빛 도사였을까?'

문득 교차점이 없는 그 두 인물이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1999년의 N을 찾아온 달빛도사인지

달빛도사가 2009년에 그로 변신해 나타난 것인지..

자신이 1999년의 그를 만난 것인지..

지금의 달빛도사를 만난 것인지..

N은 꼬여버린 이 세계들을 더 이상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돌이킬 수도 없기에 그저 이 모든 꼬여버린 세계를

받아들이고 지켜보아야 함을 알았다.


-


N은 다시 한번

함께 템스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서 나눴던

그 남자와의 대화를 떠올려본다.


[ 자살을 결심한 그와 N이 다리에 서서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그는 N에게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조용하고 거대하게 흘러가는 템스강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I'm dying..

because I want to go to heaven...

But... if I commit the sin of suicide...  will I go to hell?"


그는 천국에 가고 싶어 죽는다 했다.

그리고 아이처럼 두려워했다.  


N은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젖 먹던 힘을 다해

물 위에서 계속 소리를 쳐서

사람들을 불러보기로 결심을 했지만..


그 강렬했던 용기와 심장의 열기가 정말 오로지 N의 것이었을까?


죽음을 앞둔 그의 두려움이 N에게도 스며들었다.  


덩달아 밀려오는 두려움을 동반한 슬픔에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담담하게 닦는다.

그리고

N은 그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는 분명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N,

"Please... Don't go to Heaven.

천국에 가지 마요.

우리 다시 만나요.

동양에선.. 사람이 돌고 돌아 다시 태어나고

다시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해요.

그러니 천국에 가지 마요.

나랑 언젠가 다시 만나서

... 그때... 우리 제일 친한 친구가 돼요.

첫눈에 서로 알아보기로 약속해요.

서로 다른 모습이라 해도...

시간이 조금 어긋난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promise.. please.

We will be Best friend. Eternaly."


한국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는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간절한 N의 마음을 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N과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가슴에 간직한 채 강물에 뛰어든다.   ]


-


이번 생의 육안으로 보이는 그것들을 바라보고 쫒으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으로

이 모든 세계의 얽힘을 가늠할 순 없겠지만

그렇게 N과 그 모든 인연들이 만나야만 했던 이유라도

누군가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발머리의 화가는 혼자 복잡한 생각에 빠진 N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다.  

그녀는 조금씩 사색이 되었던 얼굴빛이 돌아온 듯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것이 있다며 N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Where is my painting you bought?"


그림의 행방을 묻는 그녀에게

N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긴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그녀가 그 모든 사실을 믿지는 않겠지만

그 그림 역시 강물에 빠져 지금은 흔적도 없이 강바닥 어딘가에서

썩어가고 있을 테니..


N,

"Unfortunately...

I gave it to him as a last gift. Right now... I don't have it."


금발머리 그녀는 놀라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왠지 짐작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10여 년 전 코벤트 가든의 그를 만나

함께 나눈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about 10 years ago~~ I met him singing.

A picture I drew... he often said

She's some kind of Asian woman.

He said he often dreams of that woman.

He committed suicide in that world.

and said~  he couldn't protect her until the end.

It was really hard to believe...

I imagined in detail the face of the woman he was describing... "


이상하다.

뭔가가 또 바뀌었다.


N이 만났던 1999년의 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금발머리의 화가가 1999년에 만났던

그 남자는 어떤 동양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꿈에 동양인 여자가 자주 나왔는데..

자신이 자살을 했기 때문에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이상한 이야기.


분명 N과 그 남자와 함께 뛰어든 이후

그 남자의 얼굴이 달빛 도사로 변한 이후

세계가 뒤바뀐 게 분명하다.


'뭔가 이상해...  내가 그를 만났기 때문에

과거의 그의 세계가 바뀐 거라면...

그가 미래에서 온 나를 만났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야 맞는 건데...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  꿈이라니?

그가 꿈에서 자주 보았다는 그 여자가 논개라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럼 그가... 내가 바꾸었던 세계 속에

논개와 관련이 있는... 다른 인물이라는 거야?

아... 머리 아파..'


그때 N은 불현듯 어떤 세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1500년.. 그 세계에서..

주논개보다 먼저 자살을 해서..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고 미안해할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주논개에게 편지를 썼던.. 그녀가 지아비라 불렀던

그녀의 남편. 최성효.

내가 그 촉석루에서 최성효가 논개에게 써준 편지를 엿보았지..

그러면 말이 되긴 해..

그러면 자살한 이 남자가... 1500년에 살았던 논개의 남편이기도 하고..

1500년 타이타닉 배가 가라앉을 때

내가 구해줬던... 잭이기도 하다는 거야?'


N이 추측한 연결고리는 너무나 복잡했다.

이 모든 가설들이 조금이나마 맞아떨어지려면

모든 세계가 중첩이 된 채로,

그 상태로 또 무한한 세계가 가능성으로 뻗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인간의 머리로,

위대한 인간 물리학자의 연구 따위로 밝혀 낼 수 없는 수준 아닌가?

 

'그 세계에서.. 주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결국 투신했어.

먼저 자결한 그녀의 남편.. 최성효를 다음 생에 만났을까?

만나지 못하게 계속 뒤틀린 세계와

만나서 못다 이룬 사랑을 나눈 그런 세계가 저마다 다른 세계와 중첩된 채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는 무슨 인연이길래.'


이 세계의 모든 인연들은 서로 엮이고 엮여

수많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수없이 많은 길로 뻗어나가고 있다.


자살한 그 남자가 꿈에서 만난 여자가 논개라면

그는 논개의 남편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다음 세계로 이어진 거라면

그가 만난 1999년의 여자는 논개여야 한다.

하지만 그 남자가 만난 건 N이다.

그렇다면 그 논개가 N이어야 한다.  

하지만 N이 운명을 바꾸려 들어갔던 그 촉석루의 세계 속에서

N은 논개를 타인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N은 실타래를 잘라버리기로 한다.


뒤바뀐 세계들 속에 엮이고 엮인 인연의 실마리를 어떻게 다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더 이상 달빛 도사는 나타나지 않기에

이 모든 세계의 비밀과 인연에 대해 질문 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질문도 할 마음조차 없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얽힘에 더 이상 관여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는 직감이 왔다.

정말 끝내야 하는 지점이었다.  


-


언제 다시 만날 지 알 수 없는 금발머리 화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N은 길버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N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길버트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  끝 -



-13편에 계속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