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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Oct 26. 2024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아름다운 섬 '비우포트'에서

그는 웬만한 주부만큼 요리와 살림에 꽤나 실력자였다.

또한 선호하는 예술 취향도, 음악마저 때로는 N보다 젊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 생각이 젊었고, 운동을 쉬지 않았고 치열하게 살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지만 어떤 것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경계 없이 열려있었으나 어떤 것도 선 안으로 함부로 들이지 않았다.  

그의 외모는 나이에 비해 퍽 동안이었다.

간혹 튀어나오는 그의 유머와 장난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그러나 때론 그는 어두웠다.

그 블랙홀 같은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가 품은 심연의 어둠이 가늠조차 되지 않아 N은 종종 혼란스러웠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을 들어도 N은 도무지 가늠이 안 됐다.

그가 하는 일은 완전히 전문적이었고, 범위는 세계적이었다.

그의 일은 쉬운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블랙'이라 했다.

물론 농담일 것이다.

N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며 자주 불안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생뚱맞게 다른 소리를 했다.  


"있잖아.. 가끔씩 꿈에 어떤 여자가 나와. 어떤 남자도 나오고.

남자는 검은 두루마기 같은 걸 입고 있는데...  저승사자인가 해서

꿈에서 깨면 항상 나 죽는 건가..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

오늘 당장 죽어도 사실 나는 아무 여한이 없으니까.

그런데 매번 아무 일도 없더라...?  

그러다가... 너를 처음 보고.. 이상한 게 보였어.

니 얼굴 뒤로.. 어떤 세계의 장면이 펼쳐지는 거야...

저 여자애는... 이미 여러 번 죽은 사람 같은데 왜 저렇게 반짝거리게 살아있지?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계속 궁금했어. 네가 계속 궁금하고 보고 싶은데... 나같이 이미 세상 다 살은 놈이... 어떻게 너 같은 애를...

감히 욕심낼 수 있을까.. N. 너야 말로....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니?"


-


밤바다의 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온기가 필요한 그와 N은 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독이 만든 무음의 어둠 속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를 떠난 사람과 그를 배신한 사람에게 이리저리 당했던 트라우마 또한 깊었다.


N은 순간 그에게서 여러 세계의 중첩들 속을 거쳐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어떤 세계에서 그는 자살을 했고, 그 후 남겨진 사람들은 비참하고 외로웠다.

그는 그런 세계를 숱하게 거쳐왔다.

그의 고독은 비단 이번 생애의 것만이 아닐 것이다.

깊고 진한 고독의 나이테가 그의 눈빛에서, 중저음의 목소리에서, 투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한 가닥씩 만져졌다.


N은 그에게 그저 이번 생의 짧은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나머지는 신비로움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


그는 부드럽고 큰 손으로 N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N을 껴안았다.  

그의 오른쪽 목덜미 피부에서 어떤 향기가 났다.

분명 오래전 맡아본 적 있는 시원하면서도 파우더리 한 포근한 향기..

그리고, 그 밑바탕에 어떤 꽃향기가 깔려있었다.


N은 순간 깜짝 놀랐다.

"잠깐...  아저씨! 아저씨한테 무슨.. 좋은 향기 나요."


그는 어리둥절해했다.

"향기? 음.. 나 향수 같은 거 안 쓰는데?"


N은 코를 킁킁거리며 그의 머리카락, 얼굴, 목, 가슴팍에 코를 대고 그 향기를 찾아본다.

 

"킁킁... 킁! 킁! 음?  분명히... 무슨 꽃향기가.. 어.. 어!... 이거...'


어느 시점에 깨달았다.


'금목서야!'


N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분명 금목서 향이다.

그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불어온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나무는커녕 흩날려온 꽃잎하나 없는 해변이었고

무엇보다 비우포트 섬에는 분명 금목서가 없다.


"이 향기... 금목서향인데... 아저씨한테 왜 이런 좋은 향이 나요?

저 이 향기 진짜 좋아해요. "


도대체 금목서와 N의 중첩된 세계들에 대해 어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마음으로 몰래 외쳐야만 했다.


'돌고 돌아..  만났군요!

내가 구해준 잭, 먹 향이 나는 편지의 주인, 노래를 하던 코벤트가든의 가수,

나의 달빛 도사, 나의 구원, 나의 운명...! 그 무엇일지라도.'


그는 영문을 모른 채 N을 따라 두리번거리다 이내 피식 웃는다.

그러다 다시 뭔가 감상에 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너같이 반짝거리는 애를... 어쩌냐...

우리가... 무슨 인연으로 만났을까.. 궁금하다.

어쨌든 말이야...

너.. 영화하는 사람이니까..

혹시 시간이라는 게 실제론 없다는 거 알아?"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N은 가슴에 벅차오르는 설렘으로 그를 꽈악 껴안았다.

 

"몰라요!" 


잠시 온몸이 마비된 듯 굳어서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만 짓는 그는

N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N... 너 정말...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곤 숨을 거칠게 내뱉은 양손으로 N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두 사람은 차가운 새벽바다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N은 온 마음으로 외쳤다.

그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어떤 세계의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른 채 뜨겁게 외쳤다.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


비우포트섬의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오고 어디론가 쓸려나갔다.

그럼에도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다른 모습으로 돌고 돌며 머무를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모습을 바꿔 찾아오는 바다처럼

오래오래 이 세계를 살아온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끝.

다음 편부터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_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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