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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Oct 26. 2024

에필로그(상). 판사에서 영화감독으로

미래 선택

N이 창신여고 3학년이었던 2007년 9월.

병원에서 퇴원 후 다시 평범한 고3수험생이 되어 학교로 돌아갔다.

수능이 2달 반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병원 침대에 붙어있는 식사용 접이식 테이블 위에서 팔에 꽂은 항생제 링거 냄새를 견디며

이를 악물고 수능 대비를 했다.

부상투혼이 빛을 발한건지 다행히 10월 전에 치른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언어는 1등급.

외국어, 사회탐구, 과학탐구, 국사 등 대부분 과목은 2등급을 찍었다.

항상 젬병이었던 수리영역만 예외 없이 3등급이었지만 N의 기준에선 전반적으로 꽤 만족스러웠다.  

N의 담임은 이 정도 성적이면 인서울에 의대는 어려워도 법대 정도는 노려볼 만 한데

수능 운빨이 밀어줘서 등급이 더 상향되면 지방에 있는 의대도 조심스레 기대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N은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이미 질병과 관련된 모든 환경과 물질들에 진절머리가 난 터였다.

병원밥의 그 밍밍하고 미지근한 맛, 입원실 화장실에 진득하게 풍기는 오래 묵은 항생제의 시큰한 냄새.

간혹 소화가 안 돼서 먹은 걸 다 토할고 싶지만 나오는 건 가래 낀 누런 침덩어리일 때 그것을 보는 그 메스꺼움과 답답함. 오래된 환자들에게서 나는 퀴퀴한 흰 곰팡이 같은 냄새, 틈만 나면 밀려오는 무기력과 졸음.

매일 팔과 엉덩이에 꽂아대는 주삿바늘의 따끔한 고통.

왜 내가 이런 침대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원망 섞인 우울감.

의사라는 직업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해도, 어떤 위대한 생명을 살리는 소명의식 같은 게 부여되어

존경받고 멋져 보인다 해도, 이런 질병의 세계에서 환자를 대하며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N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선생님... 병원에 있던 제 몰골을 보고도 의대를 권유하신다고요?...

제가 환자로 살다가 무슨 생명에 대한 소명의식이라도 생겨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살리고 싶다느니

뭐 그런 생각이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담임은 너무 당당하면서도 회의적인 N의 반응에 가만히 쳐다보시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허허허... 아이다 ~~!  하이 튼 애어른 같은 건 여전하노!

N아!  니 그래~ 병원에서 세월 다 보냈어도 성적이 이래 잘 나오니까 ~~

슨생님이 기분이 좋아가 안그라나? 의대는 영 싫다는 기가?"


N은 억지미소를 날려주며 대답한다.

"네... 선생님... 싫어요!"


"맞나...? 니가 싫다면 어짤수 있겠나.

그라몬 니는... 어데 가고 싶은데?"


N은 잠시 고민한다.

"제가 병원에 있으면서 안 그래도 진로를 생각해 봤거든요..."


"어, 그래.  그래서?"


N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친다.

"선생님! 저.. 법대 좋아요! 판사 되려고요!!"


담임은 예상외의 답변에 덩달아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내 그럴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판사? 어.. 그래그래. 그럼 법대를 가겠다는 거제?

그래... 그라몬 니 완전 인서울에 스카이 정도는 가줘야 될 수 있데이.

근데 또 인자는.. 고시도 폐지된다카고... 로스쿨을 드가서 법조인이 된다고 하거던?

니 알고 있나?"


N도 최근에 컴퓨터를 좀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법고시는 몇 년 후 폐지될 예정이고 그 후엔 로스쿨을 통해 판검사와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소식.

하지만 유예기간이 있기에 N이 30살쯤 되기 전까지는 사법고시와 로스쿨이 공존할 거라 하니

N은 어느 쪽으로든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네 선생님. 저도 듣기는 했어요. 근데... 로스쿨 같은 곳은.. 돈이 너무 많이 들것 같아서요..

저는 사법고시 아직 있을 때 빨리 시험 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렇게 담임과의 진학상담을 마쳤다.

N이 병실 티브이에서 주로 본 것은 공중파 뉴스였다.

딱히 궁금해서 봤다기보다는 계속 틀어져있기에 그저 멍하니

티브이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모가 가져다준 오래된 노트북에 USB를 꽂아서 불법다운로드 한

저화질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N이 병원에서 보낸 2007년의 8개월 간

조용한 병실과 달리 바깥세상은 많이 시끄러웠다.

대기업 회장의 종업원 성폭행 사건,

미국 버지니아주 총기난사 사건,

그리고 7월 여름엔 아프가니스탄에 한국인 30여 명이 피랍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저 세계의 사람들은... 이번 생이 참 고달프구나..

저들 또한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 저런 생을 살고 있는 거겠지.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세계는? '


무수한 사건사고의 연속이 이어지던 그 해.

N은 뉴스를 통해 미묘한 어떤 정의감이랄까

진실에 대한 추구 같은 것에 어떤 갈증이 생겼던 것 같다.

세상에 하고많은 직업 중에 공교롭게도 판사가 되고 싶다는 불꽃이 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머물러 정말 그 길이 맞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달빛도사는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기에 그 질문은 덮어두었다.


뉴스 채널이 끝나면 옆 침대에 누워있는 60대 아줌마 환자가 연속극 채널로 돌린다.

질리지 않는 출생의 비밀과 등잔 밑이 어두운 불륜, 자식의 애인 때문에 속을 썩이고 원수의 집안과 엮이는

그렇고 그런 말초적인 자극제들.  

N은 그 뻔하고 극단적이고 비루한 전개의 드라마를 보며

이 세계의 모든 꼬여버린 인연의 단면들을 거슬러 생각해 본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될까?

그 하찮고 무거운 인연들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있나..?'


퇴원을 앞둔 그때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인물이 N을 찾아왔다.


그 놀라운 이의 방문 이후 - N은 점점 몸이 급격히 회복되는 것을 느꼈고

컨디션이 많이 회복했을 때쯤 드디어 병원에서의 탈출을 허락받고 퇴원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


창신여고 3학년 7반의 창문 밖에는 학교에서 가장 잘 관리된 화단이 있었다.

그 반에 배정받은 학생들은 다들 그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오래전 이 학교에 발령받아온 어떤 선생님이 그때부터 이 화단에 꽃나무를 가꾸고 심어온 정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각기 다른 꽃들이 피어나서 지루하지 않고 사계절 화사했다.

학업에 질린 3학년 7반 학생들과 N의 즐거운 눈요기가 되었다.


바람이 코 끝을 스치는 느낌이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하는 11월 초.

이제 모두 며칠 안 남은 수능을 위해 각자 최고로 편안한 복장과 자세로 모의고사 기출을 풀거나,

절반은 책상에 엎어져 포기한 듯 꿀잠에 빠져있는 장면.

분위기는 둘로 나뉜다.

N은 그 양쪽을 모두 오갔다.

10년을 파고들어도 잼병인 수학 공식을 하나라도 더 외우려 안간힘을 쓰다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단잠에 빠진 짝꿍을 따라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엎어져 잠이 들기도 했다.

몸은 거의 회복이 된 듯 가벼웠고, 한 달에 한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지만

수술 경과가 워낙 좋으니 앞으로 면역력을 높이라고 밥을 잘 먹으라는 둥의 조언을 듣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병원의 밍밍한 밥에 입맛을 잃어 반강제로 소식을 하다 보니 살이 많이 빠져서

167cm의 키에 몸무게는 52kg까지 떨어졌다.  

저녁 급식을 먹은 후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면

여학교의 시끌시끌한 분위기도 가라앉고 저마다 교과서와 노트를 펴고 씨름을 한다.

N은 왠지 교실 공기가 답답한 느낌에 비어있는 창가 쪽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는 창문을 살짝 열로 시원하게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코를 킁킁 거린다.

화단에는 나무 외에도 꽃화분들이 여러 개 테두리에 빙 둘러 있었는데

가을이 온 것을 알리는 노란 국화꽃들이 만개해 있다.

국화에서 풍기는 약인 듯 향인 듯한 묘한 향기가 허브 같기도 하고 한약 같기도 하여

N은 온몸의 세포가 한약탕을 들이마시듯이 국화꽃향기에 취했다.

드문드문 자주 생각이 나지만 잠시 또 다른 세계에 가 있을

달빛 도사의 행방이 궁금했다.


'꽤 몇 달이 흘렀는데... 도사님은 또 언제 나타나려나~

내가 부르면 짜잔! 하고 나타나는 알라딘의 지니처럼 짠!'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뭔가가 퍽! 하고 화단에 떨어졌다.


"뭐지?!"


하고 창문을 벌컥 열고 화단 아래를 보니

여전히 팔랑거리는 흑나비처럼 까만 도포에 갓을 쓴 쪼끄만 달빛 도사가

국화꽃 화분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다.


"도사님~~!!"

N은 다른 친구들이 듣지 못하게 모기 같은 소리로 외친다.


"도사님~~! 와... 신기하다.

나 분명히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진짜 나타나시네?"


달빛도사, 거꾸로 꽂힌 머리를 겨우 흙더미에서 뽑아내어

화단 흙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는다.

심통이 가득한 표정.


"N... 한창 약물을 끓이느라 냄비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더니

아 중요한 순간에 부르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더니 입에 들어간 흙을 투! 투! 하고 뱉어낸다.

"투! 투! 퉤퉤!! 에잇... 나 참."


N은 그런 달빛 도사가 꽤나 귀여웠다.

"크크크 도사님... 오랜만~~ 화분에 떨어질 줄 누가 알았나? 흐흐"


달빛 도사 그러더니 갑자기 화단 위에 피어난 노란 국화꽃의 향기를 흠~~ 하고 들이마신다.

"오호라..  이게 여기 있었구먼!! 내가 지상의 샛노란 국화향을 얼마나 선별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N은 신기하게 구경만 하고 있다.

"오... 그 국화가 도사님이 찾던 꽃인가 봐요?"


"그래 이놈아! 너랑 연결된 이 세계의 병마들을 치료하느라

내가 신의 세계와 지상의 꽃을 다 수집하느라 요새 아주 그냥 정신없이 바빴다고 ~"


N은 도 모르는 척 능글맞게 수다를 떤다.

"아하~ 그래요? 뭔 말인진 모르지만 어쨌든.. 또 나랑 연결된 뭔가를 해결하고 다닌다는 거죠?"


도사

"허허 이제 척하면 딱이구만. 아무튼 - 요즘 몸이 한결 좋지?"


N

"맞아요 ~ 요즘은 엄청 날아갈 듯이 가벼워요!

언제 병원에서 그렇게 개고생을 했나... 싶다니까요!"


도사

"전부 내 덕인줄 알아라 ~~ "


N

"예~~ 이! 어련하실까요~~."


도사

"거참... 가장 중요한 약재가 빠졌다 했더니..

공교롭게도.. 네가 있는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이 노란 황국은 내가 데려가마."


N

"어허... 꽃과 식물을 살리신다는 도사님이 그렇게 함부로 꽃을 꺾으면 되는 일이겠어요?! 에?"


도사

"하여간 잔소리는. 니들 인간들이 훔쳐가면 꽃은 목이 꺾여 죽는 거지만 말이다..

나는 이 생명들이 피어나서 목적을 다하도록 때가 되면 데려가는 것이다.

그제야 이 꽃도 태어난 목적을 향하여 죽음 이후에 쓰임이 되는 것이지."


N

"흠.....   그래요... 꽃들은 그렇게 죽음 이후에... 쓰임이 된다는 거죠...

그럼.. 사람은요? 사람은 목적을 위해 죽음을 맞는 건가요?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억울하고 분통하고 허무하고... 처참하죠.

그냥 그렇게 쉽게 저 한 송이 꽃처럼 뭔가에 의해 목이 꺾이던데요?"


도사

"흠... 꽃과 동물과 인간의 생명은 저마다 다른 길을 걷는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어도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기에 호랑이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토끼는 그 생에 쓰임이 된 후 다음 생으로 다시 이어질 뿐이지.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신이 가지는 대부분의 것들이 인간에게도 부여되었기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하는 것은 천지에 죄가 되는 것이지.

부여된 가치가 그만큼 큰 것이다.

그만큼 지켜내야 할 많은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지.

그래서 인간 세계엔 규칙과 질서 외에도 도덕과 선이라는 위대한 것이 인간을 크게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N

"하아....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시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해서 말이죠.

판사가 되려고요!  선을 분별하고, 악을 벌하는 - 정의를 추구하는 판사! 어때요? "


달빛도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에휴... 결국 그 세계가 움직였구먼..."


그리고는 난감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누른다.

"아이고... 두야...  약물 끓이느라 깜빡 한 새에... 그 세계가 드러났어....!"


N

"아? 세계....? 또 어떤 세계가 드러났나요?"


도사

"너 오늘 몇 시에 끝나냐?"


N

"오늘요? 아.. 야자는 매일 밤 10시에 끝나요! 왜요?"


도사, 하늘을 쳐다보더니

"나와 함께 가자! 시간이 촉박하구나."


N

"지금? 당장?!... 아아....

안 그래도 오늘 공부는 접은 지 오래예요! 어디 가는지 몰라도 갑시다!!"


노란 국화꽃에서 가느다란 꽃잎들이 바람에 후루룩 날려갔다.

교실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꽃향기에 학생들은 저마다 코를 킁킁 거리며 신기해했고

N은 책상에 보이지 않았다.


-  



때는 1361년 9월.

어딘가 모래바람과 잘려나간 잡초들이 얼굴을 때리며 세찬 바람이 부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N이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봐도 달빛 도사는 보이지 않고

N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뭔가 요상함을 감지했다.

마치 달빛도사의 옷을 베껴 입은 듯-

휘날리는 길고 검은 도포를 걸치고 복부 가운데는 푸른 끈으로 허리를 동여맸다.


"이게.... 옷이... 뭘 이런 걸 입고 있지?

도사님~~! 도사님~~!"



 에필로그(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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