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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바다 Oct 27. 2024

에필로그(하). 전생에 나라를 구하긴 했는데

더 큰 죄를 지었나 보다.

아무리 불러봐도 달빛 도사는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직감적으로 N은 자신이 살던 그 시대, 그 동네는 아님을 알았다.


갑자기 저 멀리서 땅이 진동하듯 울리더니

뿌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한 무리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데

어림잡아 몇 백 명은 되는 듯 보였다.


"히익~! 저게 뭐야!"


까무러칠 듯 놀란 N이 발을 동동 구르자 갑자기 몸이 번개처럼 빠르게 공중으로 치솟더니

휘리릭 하고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서 멀리 어떤 산중턱 절벽 위로 올라갔다.

자신의 몸이 마치 순간이동인지 공중부양인지를 한 것 같아서 또 한 번 놀라는 와중에

뒤로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N에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곳을 가만히 응시하니 웬 모시 한복을 입은

40대 초반 같은 외모에 퍽 진지한 분위기의 남자가 걸어 나온다.

N은 자신의 속에서 어떤 말이 쑤욱하고 튀어나오는 걸 느낀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N.

'어어... 뭐야...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N이 저절로 스승님이라 부르게 된 그 남자는 딱 조선시대 선비였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화용아.

한창 그 자가 군사를 데리고 훈련 중이구나 - 어떻게 보았느냐?"


N은 도대체 뭐라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퍽 난감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이 줄줄 나왔다.

"예 스승님. 제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며칠 살펴보니

'방원'그자는 지치지 않는 체력에 군사들과 군사들의 식솔들까지 눈 아래 두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야망이기도 하겠죠.  

스승님과 뜻을 함께 한다고 했을 때 미심쩍은 구석이 워낙 많았으나

그 속내는 우선 덮어두고 스승님의 일을 진행하기에 장기판 말로 잘 이용될 수 있겠습니다."


스승은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네가 잘 보았구나. 성질만 고약하고 비리비리한 무지렁이 한량인 듯 하지만

그자의 속내는 그 아비보다 더 잔혹하고 야망이 깊지.

언젠가 우리에게도 독이 될 존재이지만 대업을 이룰 때까지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뜻을 위해 큰 일을 해 줄 인물이 될 것이다.

네가 그 자를 잘 쫓아 살피거라."


N

"예. 스승님....  그럼 건국의 모든 계획이 다 세워지신 겁니까."


N은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하여 속에서 자꾸 말을 내뱉는다.

이 은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거대한 대화라니.

지금껏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의 운명을 움직이는데

자신의 존재가 해답을 알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라를 건국하는 대화라니.

까딱 잘못하면 역사의 큰 흐름이 뒤틀리는 것이 아닌지 두려웠다.

문득 산에서 만난 흰 수염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보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보니 4대가 흘러 있었더라는

그런 신비한 도가의 이야기처럼 이 모든 것이 길고 질긴 꿈이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마치 현실 같은 생생한 눈앞의 상황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스승

"그렇다.. 계획은 완벽하다. 삼권이 분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최선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지.

왕은 그 삼권의 권력 중심에 자리를 잡고 철저히 지켜봐 질 것이다.

무식한 무신들의 독재는 그 감시망 속에서 싹이 자라다가도 금세 들켜서 뿌리 채 뽑히도록 해야지."


N은 그 선비의 말에서 어딘가 모르게 역사책인지 교과서에서 읽어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건국을 한다는 거 보니... 삼국시대 중 하나인가? 고구려? 조선? 조선이구나!

조선 건국 전이야. 그렇다면... 그 모든 계획을 세웠다는 저 사람은.... '


그때 멀리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한 명이 또 있으니


"삼봉 ~~~"


N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삼봉? 그래. 맞네. 저 사람이 삼봉... 정도전이야.'


푸른 도포를 입고 긴 갓 끈을 단채 달려오는 선비는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N과 삼봉의 가까이로 왔다.


"삼봉!  삼봉! 아 -  자네, 화용이 오랜만일세."


N은 살짝 경계하며 인사를 나눈다.


"아, 예.... 나.. 의리..?"


선비는 누굴 만나러 왔는지 계속 N에게 말을 건다.


"그러고 보니. 원나라의 일은 어찌 되었는가! 그 홍건적 무리들 말일세.

접선이 되었는가."


N은 당황스러웠다.

"아... 예.. 나으리.  접선.. 이 되었지요?"


삼봉도 더러 묻는다.

"홍건적 떼가 언제쯤 도착한다더냐?"


N이 대답을 할 차례였으나

술술 자동으로 내뱉던 말이 이제 떠오르지가 않았다.


'... 자... 뭐라고 대답해야 하잖아.. 근데 왜 아무 말이 안 나오지?... 약빨이라도 떨어졌나.

뭐라고 해야 할까.. 잠깐만. 그러니까 저 남자는... 정도전이고....   저 선비는 누군지 모르겠고 아무튼

나는.. 음... 화용인가 하는 또 자객이로군.

근데 나는 얼마 전에 원나라를 다녀온 것 같고... 홍건적 떼가 언제 도착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N이 어버버 하며 멍하니 있자

삼봉과 선비는 이상한 듯한 표정으로 계속 캐묻는다.


"어허 화용. 삼봉도 나도 이리 묻지 않는가.

장군이 언제 움직일지 때를 잡아야 하는데 어찌 말이 없는가."


그때 N의 코끝에 노란 국화꽃의 향기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어디서부터 불어온 향기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달빛 도사의 움직임이었다.

그 후로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다시 술술 말을 이어나가는데..


"예.. 삼봉어른. 나으리.

홍건적은 이미 한차례 패한 후 원에서 일부 전열을 다듬고 있습니다.

홍건적의 우두머리패들이 부하들을 독려하고 원으로부터 식량을 끊임없이

수탈해 조달하며 군사훈련을 더욱 철저히 시키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가진 철의 무기를 더 늘리기 위해

변방 약소민족을 약탈하여 더 많은 농기구를 빼앗아 철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상태로 더 힘을 길러 고려를 재침입한다면...  고려는 그날로 끝장일 겁니다."


삼봉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선비는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 그렇다면..."


N은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제가 원으로 간 것이 아닙니까.

홍건적의 우두머리들은 저마다 권력을 쥐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에

제가 첩자가 되어 그들 사이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왔습니다.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고 마음이 급한 그들은 철기가 다 만들어지기 전에

서둘러 고려를 치려고 할 것입니다.

대열이 흐트러지고 식량을 더 확보하지 못한 채로 전쟁만 일으킨다면

그 틈이 바로 이장군이 움직일 기회라고 보입니다."


삼봉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선비는 그제야 얼굴에 온기가 돌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군.

삼봉! 역시. 화용 무리를 원으로 보낸 것이 훌륭한 비책이었구려."


삼봉

"대감. 그러나 우리의 계산일 뿐입니다.

이제 이장군이 본격적으로 그들을 토벌하여 커다란 공을 세울 판을 깔아야겠지요."


-


절벽 너머로 붉은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삼봉과 대감이라는 사람이 돌아간 후

화용은 그 절벽에 홀로 서있다.


'갈수록.... 난감하네. 난감해.

난감한 수준이 아니라 이건... 정말... 미친!!!'


"도사님~! 진짜 이건 아니잖아요~!"


홀연히 한 줄기 휘파람 소리와 함께 N의 옆에 나타난 달빛 도사.

"하하핫! 그들을 잘 만나보았느냐?"


N, 볼멘소리로

"저기요 혹시... 나 조종 인형... 아니, 그러니까.. 꼭두각시 뭐 그런 거예요? 네?

아니 지금 이게 꿈도 아니고 영화 속도 아니고... 이거 완전 리얼이잖아!!!

근데 실제 일어났던 이 시간에 내가 떡하니 떨어져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누굴 만나고 있는 건지...

아니 도대체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신 거죠?!"


도사는 먼 - 하늘만 바라보며 묵묵부답이다.


"허허...  "


N은 포기한 듯 그저 되물어본다.

"예... 예...  제가 뭘 알겠어요... 이 엄청난 인물들을 만나서 제가 내뱉는 말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원... 뭐 어차피 이것도 다 ~~ 정해진대로 가는 거면...

내 책임은 아닌 거야! 그렇죠? 난 아무 잘못 없다고요."


도사

"그럼 누구의 책임이냐.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이 그럼 도대체 누구의 책임이냔 말이다."


N은 황당했다.

"아니... 나를 함부로 막 이런 과거로 데려와 놓고는.... 내 입이지만 알 수 없는 말들이

내 입으로 술술술 나가버리는데... 이게 내 책임이란 거예요?!!"


도사

"아유 귀 아파.  그래! 누가 니 책임이라니?

그저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모두의 책임인데 그 누구도 그 책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깝지."


N

"모두라 하면... "


도사

"홍건적... 그 잔혹한 무리들 또한 원나라에선 그저 권력자의 학정과 수탈에 분개하며 일어난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순박한 인간들이라도 무언가를 위해 들고일어난 후

사람 머릿수에 의한 권력이란 것을 얻고 나면 저 마다 깊은 심중에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본모습이 누구였는지조차 잊고

그들 역시 그들이 분개했던 권력자들과 다름 아닌 모습이 된다.

무언가를 뒤집어엎고 나타난 자들은 오히려 그들보다 더 심해지지.

그렇게 백성을 향한 뜻, 거대한 이타심을 내세워 힘을 키우는 자들은

결국 그 말로가 더 잔혹한 권력자들이 되어 지독하게 이기적인 존재로

죄를 지으며 악연의 실타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N

"네...  하긴.. 역사를 보면 그렇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정말 스스로의 모든 영화를 포기하고

마지막 그 끝까지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위대한 인물로 새겨지나 봐요.

그런데... 그런 위대한 분들은... 그렇다면  언제, 영화롭게, 부귀하게.. 그저 평온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꿈꾸는 바가 다 그런 거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 이모도 매주 열심히 로또를 구매하거든요..

조상님들이시여 ~ 제게 로또 번호를 점지해 주소서 ~~ 하면서요. 큭."


도사,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지만

사뭇 진지하다.


"훗.. 조상들은 절대 로또번호 따위 알려주지 않아.

조상의 모습인 척 변신술을 한 채 나타나는... 그들의 재마(災魔) 일뿐이지.

사람의 몸을 써서 한번 원을 풀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야.

이 생에 일확천금을 타길 바라는 것과..

백성을 내세워 일어나선 결국 더한 권력자가 되어가는.. 왕후장상을 바라던 그들과 결이 다르지는 않다."


N

"네... 도사님 얘기 뭔 말인지는 알죠..

근데요.. 평범하고 지루하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은요..

늘 그런 꿈을 꿀 수밖에 없어요.. 그게 희망이기도 하니까요.

그게 이 지루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니까요."


도사

"N. 아니 화용아.

너는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시간을 돌이켜 어떤 영혼을 일부러 태어나게 만든 인물이지.

아까 화용 네가 한 말로 인해 이미 세계는 바뀌기 시작했다.

저 - 기 저 붉은 노을이 떨어지기 시작한 아까부터 말이다.

홍건적은 지나간 세계 속에서 고려를 2차례 침범하였다.

고려는 철기로 무장한 그들의 맹수 같은 난폭함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지.

이성계는 그 당시 홍건적이 침입하는 때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 되었겠느냐... 고려는 홍건적에 의해 점령당했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머리와 가슴이 찢기며 도살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겁탈당하며 나라는 이민족에게 짓밟혔지.

조선이란 나라는 그로부터 100여 년 후 겨우 세워졌다.

그 사이 이민족들의 피가 너무 많이 섞여버린 망한 고려인들은

나라의 말도 풍습도 잃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N

"그게 무슨..? 도사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제가 아는 역사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이성계가 그들을 크게 무찔렀죠.

그 공으로 이성계의 세력과 추종자들이 늘었고..

이성계는 그 후... 재빠르게 군대를 키워... 조선을 건국...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제가 좀.. 똑똑하잖아요? 국사 내신 올 1등급!"



도사

"그래. 역사가 바뀌었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니?  바로..  방금 말이다.

네가 삼봉과 대감을 만나기 전 원나라에 첩자로 다녀왔고

홍건적 떼의 내부 분열을 제대로 일으켰다.

그리고 삼봉과 대감에게 그들이 균열이 생긴 채로 고려에 쳐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자.. 이제 붉은 태양이 다 저물었구나. 세계가 다시 바뀌었다.

화용. 너는 이로부터 몇 번의 윤회를 더 거친 후...

고려가, 조선이, 그 후의 국가가 세워지고 안정기에 접어들고 문화가 꽃을 피우고

별세계 속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시대에...

이 모든 공덕과 죄의 인연을 가지고 N으로 태어날 것이다."


N

"..... 도사님...  이상해요...   진짜 이상해 이건.

잠깐, 그런데. 내가 화용이라 쳐요. 그러면...  내가 고려를 구하고 조선을 세우게 만든 거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공덕? 그래 공덕이 엄청나면 나 이번 생에 진짜 로또라도 하나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죄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어요?"


도사

"고려와 조선은 구했으나...

원나라와 홍건적 떼와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동료와 그 민족과

그 민족이 번성하여 태어날 그 이후의 모든 생명의 탄생을 막아버렸지.

홍건적 떼는 이제 이성계를 만나 참혹하게 패할 것이다.

한 번의 전쟁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는지 너무 모르진 않겠지.

그리고 패한 홍건적 떼는 본토로 돌아가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울 것이다.

고려, 조선보다 더 많은 머릿수를 자랑하는 한 민족이 송두리째 자멸의 길을 가게 되지"


N

"지금 그게 내 책임이라고요? 그게 죄라고? 너무 하잖아 ~!!!"


도사

"걱정 말거라... 크게는 걱정 말거라. 하나 조금은 걱정해야지.

인간들은 나비효과라 부르더구나.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은 너뿐만 아니라

지금 이 세계를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이 작게 일거나 크게 일어나

반드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너로 인해 몰살당하게 될 한 민족이 N의 뇌세포와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너는 그들의 원념에 이끌려 어떤 열망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뭔가를 결정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들의 원념이 너를 움직였다.

그래서 네가 만약 그 원념에 이끌려 정말 법조계에 연을 맺고 살아간다면...

너는 무수히 많은 재판 속에서 너로 인해 죽어야 했던

홍건적 때의 무리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마주하게 될 것이다.

때론 통제되지 않는 그들 중 한 명이 너를 피습하여 그들의 손에 이번생에 살해당할 수도 있지."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는 도사를 보며 N은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건 안되죠... 살해당하다니."


도사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겪어야 할 일은 반드시 겪게 되지.

그러나..."


N

"그러나?"


도사

"참으로... 천만 다행히도... 너의 죄보단 너의 공이 더 크다고... 하늘이 판단을 내렸나 보다.

그러기에 이 노란 황국들이 이토록 향기를 진하게 내뿜는 게 아니겠니.

자, 너는 미래를 재설계할 수 있다.

법조계와 연을 맺고 너로 인해 나비효과로 죽어간 그 민족의 원념을 받아서

이번 생에 비참하게 죽겠느냐. 아니면 재설계하겠느냐."


-


눈을 떠보니 N은 책상에 엎어져 긴 잠에 빠졌다가 방금 막 깨어났다.

활짝 열린 창문 틈새로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창문에 목을 빼고 화단 아래를 내려다보니 노란 황국에 새벽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분명 진하고 진한 그 향기는 사라지고 바람결에 실려 아주 미미한 향기만이 화단 아래에 감돌았다.


N은 도사와 나눈 긴 대화가 모두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엔.. 그냥 꿈인가...?'


다음 날

N은 담임을 만나 다시 진학상담을 시작했다.


"그래.. N아. 선생님이 한번 견적을 내보니까 말이야 ~

지금 니 성적이 쪼끔 애매.. 해서~ 스카이에 법대는 쪼금 어려울 수도 있고

성균관대 법대 쪽으로 해서 지원을 해보면.."


N은 담임의 말을 끊는다.

"저기 선생님."


담임

"어, 왜?"


N

"저.. 법대 안 갈래요."


담임

"어? 와 갑자기 하룻밤새 맘이 변했니?"


N

"하룻밤이 아닌 것 같아요. 백 년일 수도 있고요."


담임은 알 수 없는 N의 표현에 난감한 표정으로,

"먼 소리고...    N아...  니도 고민이 많긴 하제....

근데 진짜 와그리 생각했노."


N

"제가 법대를 가면요 선생님... 제 명에 못살아요."


담임

"어? 하하하 와? 맨날 범죄자들만 만나서 고마 스트레스만 만땅 받을 것 같나?"


N

"네... 맞아요. 제가 몸도 아픈데... 스트레스가 얼마나 취약한데요...

맨날 재판장에 오는 사람들 만나고 살면... 변호사는 죄지은 놈도 잘못 없다고 난리..

검사는 죄 없는 놈도 죄지었다고 난리... 판사가 진짜 뭘 판단하는 게... 맞는 건가.. 싶네요.

선생님... 저 빨리 죽기 싫거든요. 그래서. 저 법대 안 가요."


담임

"하하... 그래... 그래... 네가 싫다면 뭐... 성적이 아깝긴 한데..

그라모 니 어데 갈라고?  좀 생각 더 해볼래?"


N

"아니오."


담임

"어?"


N,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 영화감독할래요."


담임

"......"


N

"영화과 갈래요. 영화과로 제일 유명한 대학 좀 알려주세요."


N은 싱긋 웃어 보인다.


그때, 땅딸막한 교감 선생님이 손에 작은 화분을 하나 들고는   

N과 담임에게 다가온다.


"하하... 박 선생님... 학생 진학상담 중이신가 보네요.

3학년 7반 화단에 국화꽃이 참 예뻐가지고 제가 직접 화분에 좀 옮겨 심어봤습니다.

책상에 놔두이소."


교감은 작은 갈색 화분에 노란 국화꽃 한 송이를 심어서 담임의 책상 위에 놓아주고 간다.


노란 국화꽃 위에서 언뜻 달빛 도사의 갓 끈이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다.


(*삽화: "이 세계를 구해줘")



-에필로그. 끝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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