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대학 때 친구 놈이 그런 얘기를 한 후 알아챈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조금 모른척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N과 닮은, 어딘가 비슷한 분위기의, 몸매와 눈빛의, 혹은 어딘가 N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여자들에게 호기심이 갔다.
술에 취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하는 것은 포기하고 이 이야기를 하는 서로의 숨겨진 의도가
서로를 유혹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결과가 정해진 스릴 넘치는 게임 중에도
그의 포인트는 그녀가 얼마나 N과 비슷한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르는 그녀들이 과거의 사연 아닌 사연을 술술 자기 입으로 불게 하기 위해
문지석은 매년 새로운 스킬이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여자 꼬시는 스킬일 것이다.
그의 유혹에 살랑살랑 넘어간 그녀들이 웃으며 혹은 울며 어릴 적 아팠다거나 질투를 받았다거나 하는
N과 비슷한 부류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녀들은 문지석의 계략에 딱 걸려든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문지석의 스포츠카 옆자리에 앉아 드라이브를 즐긴 후 그의 오피스텔로 향할 것이다.
문지석은 밤새 그녀를 원하는 방식대로 가진 후 아침이 되면 무심하고 쿨하게 그녀를 보내버리곤
그에게 점점 매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는 비열한 침묵의 방법으로 버릴 것이다.
문지석은 짐승 같은 감각이 발달하면서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지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차갑고 다정하게 군다.
누가 봐도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일을 나눌 땐 무심하고 냉철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선 사뭇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주며 다정하게 군다.
속을 알수없어 긴가민가하다가 어느새 확실한 직진이 없어 실망하는 그녀들이 포기할 때쯤에 그는 훅을 날리듯이 어떤 공적인 명분을 내세운 1:1 만남을 또 아무렇지 않게 제시한다.
여자들이 듣기에 명분은 있으나 일부러 따로 만날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착각에 빠진다.
내게 관심이 있어 따로 만나자고 하지만 대놓고 표현을 잘 못하는 남자구나.라는 위험한 착각.
그 모든 것은 문지석의 계산된 순서, 본능적인 밀고 당기기이다.
그녀들은 그와 1:1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간다.
그런데 확실한 도장 찍기가 없다.
분명 나한테 특별한데... 이 남자 근처에 특별한 여자가 많을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느낌만 있기에 더 애가 탄다. 여자는 문지석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문지석은 자신의 환심을 사고 싶어 미쳐가는 여자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에 대해
구체적으로 흘린다.
포인트는 요구가 아니라 흘리는 것이다.
여자들은 귀신같이 그 구체적인 요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점점 문지석이 원하는 이상형을 닮으려 애를 쓴다.
목소리도 행동도 취미도 취향까지 문지석은 N이 아닌 다른 N들을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녀가 N과 다른 치명적으로 이질적인 면을 발견하면
다시 그녀가 스스로 나가떨어지도록 조장한다.
그녀가 제 풀에 지쳐 이별을 고할 때까지 조종한다.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줬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 선했다. 피해자였다. 그녀들이 먼저 유혹했고 고백했고 먼저 옷을 벗었고
먼저 외롭다며 떠난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 뿐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외모에 지독한 바람둥이로 살아가던 문지석의 눈앞에 N이 나타났다.
서울 강남의 어느 분위기 좋은 술집이었다.
N은 직장 동료들로 보이는 한 명의 나이 많은 여자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 동료와
퇴근 후 술이나 한잔 하러 들른 것 같았다.
상의는 검정 재킷에 속에 브이넥 흰 티, 하의는 검정 H라인 무릎까지 오는 치마에
갈색 스타킹을 신고 3센티쯤 되는 낮은 굽의 인디핑크색 구두를 신었다.
머리카락은 가슴팍까지 내려왔고 파마끼 없이 미끄러지는 생머리였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N이 화장실을 가느라 그의 뒤를 종종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그녀에게선 어릴적 교복의 다리미 열기 냄새나 병원 항생제의 서늘한 냄새가 아니라
장미와 풀이 뒤섞인것 같은 고급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풍긴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달래며 N의 근처 테이블을 맴돌며 그들의 들릴 듯 말듯한 대화를
엿듣는다.
N은 구청장이 어찌저찌해서 목민관 대상을 2년 연속 수상한 게 자기 공이 아니냐느니
뭔가 으스대는 이야기를 귀엽게도 늘어놓다가 독거 노인들이 얼마나 고독해서 자살을 계획하는지 카메라에 담는 일은 또 얼마나 괴로운지를 읆다가 줄줄이 키운 자식들이 부모 재산 없어지는 순간 얼마나 태세를 바꾸고 개새끼가 되는데 근데 노인들은 내 자식만은 절대 아닐 거라 믿는다느니 인간 본성이 너무 충격적이라는 그런 얘기들을 쏟아내며 한 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동료가 하는 아재개그 한 소절에 까르르 웃으며 자지러지곤 했다.
그가 바라보기에 무슨 이야기 -자랑을 하든 푸념을 하든 수다를 떨던- 를 하던 N의 목소리, 몸짓, 말투
그 모든 것이 그의 피를 끓게 할 만큼 섹시할 뿐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자신이 원하는 N과 똑같이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새벽이 넘어가자 N과 일행은 집으로 해산했다.
N은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고 그는 그의 차를 끌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갑작스러운 마주침이라 어떤 계획도 세워지진 않았는데
우선은 그녀의 집이 어딘지 알아놓고 싶었다.
광진구 골목으로 접어드는 그녀가 탄 택시가 어느 빌라 앞에 세운다.
택시의 문이 열린다.
그녀의 오른쪽 다리가 차 밖으로 먼저 보인다.
땅에 구두가 닿고 그녀의 몸이 차 안에서 빠져나오고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퍽- 하고 택시 문을 닫는다.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에 그는 점점 자신이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연락처라도 알아야 했다. 아니 그것으론 불충분하다.
오늘은 하늘이 주신 기회다.
그는 얼른 차에 시동을 끄고 내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가 말을 건다.
"너... N 아니야?"
N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3초쯤 그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미소를 띠며 반겨준다.
"어... 너... 는 문지석?"
당연히 알아보겠으나 유난히 기뻤다.
"어. 나 문지석이다.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나도.. 이 근처 살거든."
"아 진짜? 어.... 그랬구나.. 세상 진짜 좁네.. 잘 지냈어?"
N은 이제 서울말을 쓰는 듯했다.
문지석은 더 좋았다.
놓쳐버린 첫사랑이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운명이라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집 앞이다.
"진짜 반갑다... 더 예뻐졌네?"
"야. 야..... 민망하게 칭찬은. 고마워."
그 후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지석은 더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동창 보니까 너무 반갑다 진짜...
시간이 늦어서 술은 못할 것 같고.. 너네 집에서 차 한잔만 줄래?"
그 말이 더 노골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동안 숱한 여자들을 꼬시며 능청스러운 연기의 달인이 되었기에
묘하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숱한 여자들이 문지석에게 구애하며 고백한 사실이 그의 자신감을 매우 단단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오빠는 심하게 섹시해.. 여자들을 막 미치게 한다니까!'
문지석은 자신이 그렇게 성장해서 남자가 되었음을 알아봐 주길, 느껴주길,
비슷한 여자들처럼 N 또한 육감적으로 자신에게 끌려오길 원했다.
하지만 N은 매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없게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이 시간에 우리 집을 와. 말이 되냐.
어쨌든 만났으니.. 반갑고.
근처 산다니까 오다가다 마주치겠지 뭐.
나 일찍 출근해야 해서... 들어갈게. 너도 조심히가."
냉정하게도 선을 긋는 그녀였다.
여자들이 지어주는 미소가 그렇게 차갑고 선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 같다.
문지석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곤 인상을 팍 쓴다.
'나는 왜 매번.. 니 손목 하나도 못 건드리냐?'
-
문지석이 술 냄새를 풍기며 N의 집에 들이닥친 건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후였다.
취한 건 아니었지만 티나게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돌체 앤 가바나 향수 냄새가 독하게 풍겼다.
그는 벨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준 N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끌어안고 고백을 터트리는데
N이 선 긋는 여자라지만 설마 이 타이밍에선 우물쭈물거리며
미안해하며 혹은 곤란해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달래며
이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쩌면 그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달아올라
서로 한 몸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 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후 N은 차갑고 정이 없고 개싸가지 같은 썅년이라고 그는 속으로 욕을 한다.
7분쯤 지났을까 - 광진구 서에서 경찰관이 출동해 문지석에게 경고를 하고 N의 집 밖으로 쫓겨나간 것이다.
도대체 어느 틈에 뭐라고 신고를 한 건지 대충 경고하고 보내줄 법도 한 것 같은데 경찰서까지 끌려가서 신원조회와 범죄경력 조회까지 받는다. 동창이었니 뭐니 하는 건 씨알도 안 먹힌다.
접근 금지 경고와 억지 반성을 받아 낸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았다.
그가 원했던 한 밤의 야한 꿈은 망상으로 종결되었다.
그날 밤 분에 못 이겨 소주를 들이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그러다 겨우 쓰러져 잠에 빠진 문지석의 꿈에 울부짖는 여자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녀들은 모두 문지석이 쉽게 꼬시고 몸을 취하고 비겁하게 버린 그녀들이었는데
희한하게 다른 시대의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에서 피가 흘렀다. 입에서는 욕을 했다.그 눈빛은 오싹할만큼 무서웠다.
그녀들 중 한 명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는 장면에서 꽥- 하고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식은땀이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가위에 눌렸다고 생각했다.
덮어두고 싶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여자를 꼬시고 탐하고 쉽게 떠나게 만드는 것에 관해,그리고 자신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고 그녀들을 헤픈 여자들로 치부하고 버리는 것에 정말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듯한 그 죄책감을 무시하기로 했다.
앞으로 닥칠 인생의 절망이 어떤 섹시한 가면을 쓰고 찾아올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 후 N은 6개월 정도 살다 이사를 갔다.
문지석은 마음속에서 교복을 입었고, 환자복을 입었던 소녀 N만을 기억하기로 했다.
자신을 신고해서 쫓아낸 성인여자 N은 그저 그동안 숱하게 만나고 자신과 잠자리를 했던 그리고 자신에게
집착했던 여자들과 같은 쪽으로 대분류를 해놓고,
그중에서도 유달리 차갑고 개싸가지였던 여자로 특별 태그를 붙인채 기억 한편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그는 그다음 해에 중학교 동창 한 명을 만났다.
자신이 처음으로 이제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여자.
부잣집 딸이었고 6개월 만에 자신이 프로포즈를 해서 일사천리로 결혼한 여자.
그녀는 바로 N과 중학교 때 가장 친했던 여자 최수영이었다.
정착을 하고 나니 결혼하길 잘했다 싶을 만큼 괜찮았다.
그리고 바람둥이였던 자신이 갑자기 법과 제도 속에서 가정 속에서 바뀐 것처럼 느껴질 만큼
그녀가 좋아지기도 했고 자녀계획을 세우고 장인에게 돈을 빌려 사업을 기깔나게 시작하면서는
이제 수준이하로 느껴지는 다른 여자들이 좀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간 신혼의 열정을 즐기며 살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 와이프가 남자 두세 명과 꾸준히 바람을 피운 것이.
그중 정말 뒤통수 때릴 듯이 찐하게 바람을 피워 임신까지 시키고 거금의 돈까지 떼먹은
새끼의 이름은 변종수였고 또한 유부남이었다.
와이프의 바람 증거를 사설탐정에게 맡기며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하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지만
변종수가 20대 후반에 청소년을 성매매하고 감옥에 다녀왔다는 그런 지저분한 신상정보 외에
와이프의 바람과 관련된 증거를 잡기는 퍽이나 어려웠다.
더하여 정말 기가 막히게 재판에서 마주한건 자신의 변호사가 제출한 와이프의 바람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숱하게 바람피운 증거들만이 와이프 담당변호사에게서 쏟아져 나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분명 돈 많고 빽 많은 장인의 뒷수습이었을 것이다.
"시간대가 다르다고요!! 나는 결혼하기 전이라고요! 다 옛날 일이잖아! 이 나쁜 새끼들이 어디서 옛날일을 죄다 짜 맞추고 있어!"
옛날 일이라 울부짖는 괴성은 바람을 여러 번 피우고도 성실한 와이프를 배신하고 적반하장으로 몰아가려는 나쁜 남편의 마지막 발악정도로 들렸다.
그는 한 푼도 남기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났다.
오히려 정신적 피해보상금까지 5천만 원 지불해야 했다.
그 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어하며 질기고 비루한 인생을 이어갔다.
분명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옆 여학교에서 까르르 거리며 나오는 그녀들의 하이톤 웃음소리와
스치며 풍기는 샴푸냄새에 수줍어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자신의 온 세포 속에서 뭔가 뒤틀리고 단추가 잘못 꿰어진 정보들이 터져 나오듯 쾌락추구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자기감정의 변칙적인 변화와 폭발의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알 길은 없었다.
그는 문득 마음 한편에 봉인해 두었던 N을 다시 소환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간의 고뇌 끝에 자존심을 마음속 기둥에 묶어두고 전화를 건다.
통화연결음 하나 설정해두지 않는 냉혹한 그의 첫사랑. N.
"여보세요?"
문지석은 왈칵 눈물이 터졌다.
"나 문지석인데.. 끊지 마!
나 좀 살려줘.
너라면 뭔가... 무슨 말이라도 해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땐 진짜 미안했다."
-끝.
2. 그의 이름은 준철이다. 한준철.
그는 어떤 모임에서 한 여자애를 만난 후 계속 시선이 갔다.
비우포트 섬에 산다고하니 왠지 신기한 젊은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여자애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뭔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질문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 준철은 여자애에게 따로 만나자고 했다.
만나서는 그저 그때 전화로 물어본 것에 대해 그저 다시 물어볼 예정이었다.
열심히 사는 애 같았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은 채 남들과 다른 길을 걸으며
멋지게 사는 여자 같았다.
뭔가 헷갈렸다.
열심히 사는 애는 도와줘야 한다.
멋진 일을 하고 당차게 사는 여자와 가까이 지내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니, 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몇 번이고 더 약속을 잡았다.
그가 혼자 사는 집에는 그 누구도 여자를 단독으로 들인 적이 없다. 그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자꾸 꿰맨 실이 터진 듯 그의 입에서 자꾸 묘한 기류의 얘기들이 튀어 나온다.
그가 하는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지와, 집에서 어제 무슨 영화를 봤다느니 집에서 뭘 했다느니 하는 얘기들.
여자애는 어느새 그런 얘기를 듣다가 그가 사는 집이 궁금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요리를 잘하면 말만 하지 말고 해달라고 한다.
집으로 놀러 오겠다는데 그가 은근히 의도란 바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그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응원해 주는 그런 사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러다 여자애가 어느새 나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마법처럼.
떠 벌 떠 벌했던 대로 요리를 해줬다. 티브이를 틀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해 줬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 시간이 영원하길 원했다.
그러더니 열심히 사는 이 여자애가 그의 손을 잡는다.
진짜 손만 잡더니 계속 영화에만 몰입한다.
보통 여자들은 우리 무슨 사이야-라는 그런 것부터 하지 않나?
그는 혼란스러웠다. 혹시 많이 개방적인 여자인가.
그는 몇 분을 참다가 왜 내 손을 잡냐고 물어본다.
이러다 사고 난다. 여자애가 조심성이 없다. 사고 날까 봐 무섭다. 어쩌자는 거냐
라고 묻기는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뜨거워진 지 오래였다.
이 여자애는 그제야 손을 놓고, 너무 천연덕스럽게 얘기한다.
사귀자고.
그가 대답을 안 한 건 겨우 5초 정도였는데 독촉을 했다.
싫은 거냐고.
절대 아닌데 뭐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는 10분 동안 우리의 상황과 너의 앞날의 미래에 대해 괜히 설교를 늘어놓았다.
여자애는 조금 답답한 듯했다.
다시 물었다.
사귀자고. 싫은 거냐고.
확실히 해야 다음에 보는 거라고 한다.
확실한 사이가 아니면 이제 이 여자애를 볼 수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지금 우리 집에 와서 이러고 있는데 이게 사귀는 게 아니면 뭐냐고 오히려 반문을 했다.
여자애는 나에게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비겁하다거나 하는 핀잔을 주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어준다.
그리고 이제 가야겠다며 일어선다.
그는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조금 급발진을 한다.
"여행 갈까 우리?"
여자애는 변태라느니 벌써? 라느니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갑자기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졌다.
양팔을 벌리고 나에게 안기라는 자세를 취했다.
여자애는 역시 싱긋 웃으며 그에게 살포시 안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자애는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구름 신발을 신은 듯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정말... 사귀는 건가?'
그날 여자애가 잡은 왼손을 자꾸 만져보았다.
무슨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 희한한 꿈을 꾸었다.
그는 먹물로 편지를 쓰고 있었다.
조금은 알아보기 힘든 옛날 글자들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가슴이 너무 아려왔다.
어떤 사랑하는 여자에게 편지를 쓰는데 자꾸 눈물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어딘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꿈속에서 꿈을 깬다.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그러더니 다시 차가운 강물로 뛰어든다.
차가운 물속에서 어떤 여자가 나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 그때는 제일 친한 친구 해요..."
누가 그한테 한 말인지 모르겠다.
떨어지는 찰나에 심장이 멎으면서 모든 꿈에서 깼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꿈에서 죽은 후 현실에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자애가 그의 집에 왔다 간 것도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만났던 것도 같다.
여러 가지 다른 시점의 감정이 동시에 드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해 보았다.해답은 없었다.
이렇게 낯선 여자애가 이렇게 익숙하고 그리웠던 기분이 드는데 이거 혹시 사랑일가 하는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여자애가 앉았다 간 자리에서 아주 미묘한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 향기에 다시 설레어하며 왜 나 같은 놈이랑 사귀는 건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이미 사람에겐 해탈한 지 오래되었다고 믿었다.
사람과 어울리는 건 좋지만 그 누구도 진짜 믿기는 힘들다. 그게 여자라면 더욱더.
이렇게 젊고 멋진 여자애는 언젠가 나를 떠나겠지 하며 지레 걱정에도 빠진다.
너무 쉽게 다 믿어버리진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 오래 고독했던 자신을 이 여자애가 치유해 주러 온 걸까
하는 운명적인 결론의 달뜬 기대와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 기대와 희망은 천천히 사랑으로 변해 갈 예정이었다.
내일은 해외로 출장을 떠나야 한다.
'일주일 후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만나야지.
그리고 N이 산다는 비우포트 섬에 가봐야겠다.'
다시 잠을 청하기로 한다.
곧 해가 뜨면 이제 어떤 여자애가 아닌 나의 연인 N에게 뭐라고 연락을 할까 상상을 하며.. 스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