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행복한가요?
그리움, 기다림, 운명!
N은 밤새 꿈을 꾸었다.
사자가 된 자신이 어린 시절 소녀 N을 찾아간다.
그리고 N에게 어떤 부탁을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너의 운명을 치유해 줘."
-
창 밖에 코랄 빛이 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새벽녘.
꿈에서 깨어 눈을 번쩍 뜬다.
문득 심장이 시큰거리며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머리끝까지 뜨거운 열이 오르고
마음이 스스로의 통제에서 탈출함을 느낀다.
두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새어 나온다.
수많은 세계 속에서 사자이길 선택한 N은
어린 시절 소녀 N을 찾아가 스스로의 운명을 치유할 수 있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가슴 한편에 그리움을 품은 의문이 찾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해 물었다.
'그럼... 그럼 당신은 어디 있나요?'
금목서에서 처음 나타났던 그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되었을까.
다른 무엇이 되어 중첩된 세계를 거쳐가고 있을까.
N은 숱한 세계의 중첩을 통과하며 운명을 바꾸어왔지만
마지막 단 하나.
놓쳐버린 존재가 생겼다.
가슴을 가득 채운 그리움의 대상.
오래된 구원이자 영원한 희망.
N이 연극의 결말을 바꾸기 전 바닥을 기어 다니며 겪어야 했던
불에 타는듯한 그리움의 고통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흔적은 새롭게 새겨졌다.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무의식의 상흔처럼,
세포 속에 살아있는 DNA처럼 기억될 것이었다.
마치 이 중첩된 무극의 세계가 영원을 향해 나아가듯이.
-
그 후
다음 학기 개강이 다가왔고
N은 서천대 연극영화과에 복학을 했다.
군필자 남자 복학생도 아니었지만 N은 그에 버금가는 듯한 낯선 기분을 감당해야 했다.
돌아와 보니 08학번 동기들도 학비 마련을 위해 꽤 많이 휴학을 했고
09,10학번 후배들은 이상할 정도로 선배 노릇도 아는 척도 없이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N을 어색하게 대했다.
불과 신입생 때까지 N은 학과 대표였기에
선배들조차 분위기가 바뀐 N을 신기해하면서도 조심스레 대했다.
하지만 시간은 금세 흐르고
그런 분위기도 적응이 되었다.
가끔 교내식당 옆 골목에 앙상하게 말라있는 포도나무를 지켜보곤 했지만
그 후로 포도가 열린 적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이 입을 다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2, 3학년을 보내고 어느덧 4학년 졸업반이 될 때까지 흐른 시간은
별 의미 없이 기억도 어렴풋한 한 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
4학년 졸업반이 된 N은 졸업영화를 제작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공중파 방송국에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송출하는 외주제작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시작했다.
N이 맡은 시나리오는 토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교육용 만화 '안녕, 토토비'였다.
오후 4시.
어린이들이 하교 후 TV를 트는 시간.
벌써 3기가 종영되고 '안녕 토토비' 4기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담당 PD의 통과를 받으면 그대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귀여운 토토비와 동물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며 세상을 배워나가는 이야기.
만화 속에선 땅에 사는 토끼와, 물에 사는 거북이와, 하늘에 사는 새들이 모두
같은 공간에서 친구가 되어 살아간다.
N은 가끔 중첩된 세계의 기억들이 추억처럼 피어오르곤 했기에
프로그램의 취지에서 조금 오버되는 장면을 쓰기도 했다.
토토비가 꿈결에 금목서 향기를 맡고 밖으로 나가는 장면 등은 매번 PD의 첨삭에 걸려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만화 속에 금목서는 반드시 등장하도록 밀어붙였으니
이 정도 사심은 부디 세상이 널리 이해해 주길, 오히려 즐거워해주길 바랐다.
토토비가 벌어다 준 적은 돈으로 다행히 졸업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N은 '천사에게 전화가 왔어'라는 졸업영화를 무사히 제작했으나
담임교수의 평가와 수정안을 깡그리 묵살한 탓에 졸업영화제에 상영도 하지 않고 세상에 묻혔다.
-
2013년 가을. 코스모스꽃이 피어나던 날.
N은 다행히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받았다.
이젠 거친 세상에 발을 내디뎌야 할 어른이 되었다.
무거운 과제를 끝낸 후련함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했지만 그저 의연하기로 한다.
N은 온 생애를 통틀어 운명의 변화무쌍함을 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정해진 물길을 따라 흘러가면 될 것이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는 무지함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치를 믿으며
더 높은 시선으로 안과 밖을 나누는 창의 틀을 만들지 않고 늘 열려있기를 소망했다.
-
어딘가 같은 공간 속 다른 세계를 교차하며 존재하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그의 이름은 이제 '달빛도사'가 아닌 '그리움'이 되었다.
그렇게 존재의 의미는 변화했다.
그런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던 중
문득 타인의 '그리움'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온통 '나'로 닫혀있던 세계의 문이 또 한 번 크게 열리고
세상을 가득 메꾸고 있는 또 다른 '나'들 - '타인'에게로 마음의 실 한 가닥이 이어졌다.
그 수많은 '타인'들 중 N의 '그리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N이 처음 가졌던 직업은 '9급 공무원'이었다.
하루하루 위태로웠던 N은 타인들이 그토록 원하고 갈망하는 그 삶의 '안정감'이란 게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수월하게 1차 합격을 했고
2014년 당시 최종 면접에서 4K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고
처음 들어본다는 대답을 한 후 탈락을 예상했으나
그 모든 것이 무색하게 합격을 해버렸다.
N은 서울시 홍보정책실 프로듀서로 근무를 시작했고
다음 해인 2015년에는 강남구청 홍보과로 발령을 받았다.
말단 공무원 프로듀서로 살아가게 된 N이 매일 출근해서 하는 일은
그날 하루 구청장의 일정을 체크해서 뉴스 촬영 동선을 잡는다.
그렇게 낮에는 구청장을 따라다니며 지역 행사를 취재하고
독거노인과 다문화 가정을 방문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구청장의 인자한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무실에 돌아와 뉴스 대본을 작성 한 뒤 영상을 편집하고 부장의 승인이 떨어지면
홈페이지에 업로드를 한다.
가끔은 자유롭게 기획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역사를 보존하는 단체의 취재나 소상공인 홍보영상 제작,
혹은 자살 방지 캠페인 영상 등을 만들었다.
당시 심각했던 전염병이 있었는데 높은 치사율이 공포스러웠던 '메르스'였다.
감염 환자 취재를 위해 경희대병원 등에 방문할 때면
마치 우주복 같은 흰 방호복을 입은 채 환자를 대면해야 했는데
그럴 때면 감염의 두려움보다는 죽음을 앞둔 그 환자들의 중첩된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전쟁 속 살육 장면 혹은 이웃의 살점을 뜯어먹어야만 했던 지독한 기근의 장면들이
데자뷔처럼 머릿속을 스쳐가곤 했다.
그렇게 1년여간 공무원 프로듀서로 일을 하다
불현듯 N은 사표를 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른 세계의 '그리움'이 밤새 N을 찾다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그 운명의 끌림을 따르기로 정한 후
N은 곧장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섬.
제주로 향했다.
2018년 4월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N은 그 섬을 떠나지 않았다.
-
매일 아침 새벽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것이 퍽 좋았다.
그 시간 동안 파도가 일으키는 하얀 거품은
이 세계의 모든 때와 찌꺼기를 씻어내는 거대한 드럼세탁기의
거품 같기도 했다.
N의 마음속 바다 한 폭에 자리 잡았던 '그리움'은
아주 천천히 그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기다림'이 되었다.
새벽 바다와 영원히 잠들지 않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1년의 시간이 구름처럼 두둥실 떠갔다.
N은 그동안 서울시에서 만나고 이어졌던 인연을 통해
제주에서도 전공과 경력에 어울리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
-
그렇게 살며 겨울이 왔다.
1월. 새하얀 함박눈이 섬을 뒤덮었던 날.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신령스러운 사슴들이 뛰놀 것 같은 한라산 정상에 올라
새해 일출을 보고 내려온 후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N의 꿈에 푸른 잔디가 바람에 휘날리는 둥그스름한 봉우리가 나타났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 봉우리에 올라가니
그곳에선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데..
그 아이스크림 위에 얹힌 동글동글한 땅콩을 하나 깨무는 순간
저 멀리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실존하는 장소라고 본능이 말해준다.
N은 꿈에 나온 그 봉우리가 뭘까 하고 인터넷을 찾고 찾던 중
어떤 사진을 발견했다.
그곳은 'Beaufort' - 비우포트 섬이었다.
N은 당장 가방에 칫솔과 수건하나를 챙겨서
비우포트로 향했다.
-
그렇게 N은 새롭고 커다란 운명의 소용돌이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배를 타고 도착한 비우포트 섬은 낮엔 찾아온 손님들로 인해 시끌벅적 화려했고
밤에 고즈넉한 평화로움이 별빛과 함께 내려앉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N은 정처 없이 걷는 발길마다 새로운 인연들을 만났고
그들은 낯설고 젊은 외지인 여성 N을 뜻밖에 환대해 주었다.
N은 비우포트에 살기로 했다.
이 섬의 서쪽에 있는 바다는 속이 훤히 비치도록 투명하고 반짝거렸다.
육지와의 연결고리가 끊기지는 않을까 괜한 염려를 하는 N에게
안심하라는 듯 바다 한가운데서 도항선이 수시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몇 푼 안 되는 퇴직금과 티끌처럼 모아둔 돈은 겨우 6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N은 그 남은 돈을 몽땅 털어 비우포트 섬에 1년간 집을 빌었다.
어떻게 먹고살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N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시나리오로 옮겨갔다.
'영화를 한 편 만들자.'
그렇게
봄에는 고동빛 짙은 땅콩밭의 흙냄새와 청보리밭에 일렁이는 바람의 숨소리를 맡고,
여름에는 반짝거리는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첨벙거렸다.
가을에는 수확하는 땅콩과 마늘을 얻어먹고
겨울에는 N의 등을 떠밀고 살 속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의 신고식을 견뎌냈다.
급할 것 없던 N의 영화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져 갔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 역시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N은 어떤 서울시 공무원의 전화를 한 통 받은 후
배를 타고 제주시내로 향했다.
그동안 쌓아온 N의 경력과 경험들이 이 섬에 필요하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듣고는 고민할 것도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내가 가진 것이 이 섬에 도움이 된다면야.
그렇게 들어가게 된 어떤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모임 관계자들 중 가장 어렸던 N에게 냉철하고도 다정했다.
어떤 세계의 인연일까.
그의 눈빛은 어느 순간부터 N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데 익숙한 떨림이었다.
어디선가 분명 느껴본 적 있는 설렘.
어떤 존재가 가져오는 희망 같은 것.
금목서에서 나타난 그 존재.
분명 달빛 도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것이었다.
-
N은 그에게 괜히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묻게 되었고
그는 괜히 만나지 않아도 되는 만남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만남 이후
N이 초대받은 곳은 그가 혼자 사는 집이었다.
책으로 가득 찬 책장들이 있고 남자 혼자 살기엔 비교적 깨끗했지만
여자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긴 했던 그 집에서 그가 요리하는 푸짐한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파우더 같은 향기에 충동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뻔했으나
다행히도 몇 번이고 꾹꾹 눌러 참았다.
대신 그의 초대에 대한 보답을 핑계 삼아 그 후엔 N이 사는 비우포트 섬으로 그를 초대했다.
그 순간
N의 마음속에 집을 짓고 살고 있던 '기다림'이때가 되었음을 알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 N. 이제 나도 변할 때가 왔어.
나의 새로운 이름은 '운명'이야.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야. 반가워.'
-
얼마 후 그가 N을 만나러 비우포트에 들어왔다.
배에서 미끄러지듯 나오는 흰 차.
그 차에서 내리는 그의 수줍은 미소.
N은 그 순간 어떤 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감지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어서 와요! 나의 운명!"
N은 그와 함께 밤의 바다에 앉았다.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믿기 힘든 길고 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끝 -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