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지저스 나무아미타불
나는 매우 자주
상대의 말에 섞인 10%의 속내,
20%의 의도가 들려버린다.
주파수 채널 1.
“와, 진짜 대단하다. 멋지네?”
그 순간 치직 - 치직 -
다른 주파수의 중첩.
주파수 채널 1-1.
치지직 -
“왜 또 너만 주목받아?”
채널 1-2.
치지익—
“이 무대에 너는 빠져! 내 차례거든?”
치직— 채널 1-3.
“이런 X 됐다! 어쩌지? 네 잘못인 척 은근히 너털웃음 지을게~ 모른 척 해. 알았지?”
지지직— 1-4.
“나 지금 웃고 있다. 근데 너 지금 튀는 거 좀 곤란해.”
여러 개 주파수가 동시에 얽혀있으니
겉말과 속맘이 동시에 재생 중.
익숙하고 웃기는 청취는
이런 식이다.
나는 말과 동시에 잡음을 듣고
웃음 뒤에 숨겨둔 경계를 마주한다.
*과거의 한 시점
모임에 가려 나서던 날
문 앞에서 누군가 나를 챙긴다.
“N감독님~ 어디... 가? 거기를...?”
그렇게 웃고 있다. 분명 웃고 있는데?
동시에, 치지직—
“제발.. 너는 꺼져줘. 나만 주목받고 싶거든?”
또 어느 시점
그들은 익숙하게 나를 부른다.
"N감독님, 우리 - "
"N감독님, 아까 - "
그런데, 문득
바뀐 주파수가 치익-
"N. 감독. ”
호칭은 같지만, 생략이 껴들었다.
말에는 거리감이 숨어들고
숨결엔 의도가 깃든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다중 채널 라디오가 되었다.
A주파수- 표정, B주파수- 억양,
C주파수- 숨은 불편함.
나는 이 중첩된 세계에서
점점 무음 모드 - ON.
이젠
뒤섞인 목소리를 감당하는 대신,
단 하나의 주파수에만 귀 기울인다.
결국
단 한 사람이다.
말이 말로 들리고,
침묵은 따뜻하며,
시선엔 계산이 없는,
나의 세계에 단 한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뭐 어때!'
사랑은
단 한 사람으로 충분해.
이건 거창한 깨달음이 아닌
조용한 주파수 정리.
오직 내 주파수는
한 채널에 고정.
치지직- 치익-
치이익— OFF.
TV에 핫한 연예인이 보인다.
사랑스럽고 화려하다.
전 세계의 동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런데 나는
대중의 사랑
궁금하지 않았다.
‘그럼 난 뭘 원하지?’
답은
의외로 명확하게 떠오른다.
'사랑보다 신뢰'
상대적 사랑 말고
절대적 신뢰.
뜨겁게 사랑받지만
믿지 못하는 존재보다,
사랑받지 않아도
‘저 사람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어.’
그런 사람.
그러니 나는,
어떤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명징하고 확실할 것이다.
양다리 걸치지 않고,
속으로 음흉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누군가를 밟고 나를 면피하지 않는.
역시
사랑받는 건,
단 한 사람으로 충분해.
이제 내 주파수는
한 채널에 고정.
치직 -
치이익— OFF.
마이지저스 나무아미타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