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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쓰지 않기로 했어

거친 파도를 새끼 펭귄에게 맡길 순 없잖아

by 새벽바다
바다에 폭풍우가 치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ㅡ 모니터 속 커서는 홀로 깜박거린다.


단어들은 파도에 뿔뿔이 흩어지고,

문장은 아래로 아래로 침몰한다.


[새끼 펭귄이 발 디디고 선 얼음이 녹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운수 좋게도 8회차 심리상담을 받았고,

오늘이 그 마지막이었다.


나는 또 토로했다.
"왜 저는 늘 억지로 이해하려고 할까요? 사실 속은 그렇지 않거든요"
"왜 저는 자꾸 포용이라는 글자를 칭칭 휘감고 있죠?"


상담사는 고요한 특유의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모래시계 흐르는 침묵,
나는 스스로 질문 후

다시 스스로 답이 될 만한 문장을 써내려간다.


“꼭 그런 거에요.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감옥 안에서

누군가 나를 석방시켜주길 기다리는 느낌,

사실 그 문은 잠기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나는 녹아내리는 얼음 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미끄러지는 새끼 펭귄을 마주했다.


작고 둥글고, 늘 젖어 있는 그 녀석은
언제나 좁은 빙하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마', '그들을 이해해', '그냥 받아들여'라며

혼자 중얼중얼 거렸다.


“네 입장을 말하지 마.
감정은 불편하니 꺼내지 마.
관대하고 싶다면, 그들을 이해해.
선한 사람이라면, 받아들여.
포용해.

그래야 미움받지 않아.”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서

살아보겠다 발버둥치는 부모 잃은 새끼 펭귄을

혹독하게 훈육했다.


그렇게 펭귄을 길들였고,
상처 대신 미소를,
분노 대신 침묵을 꺼내도록 가르쳤다.


상담사는 나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
내가 내 속의 빙하 세상에서
편히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조용히 등대를 켜준다.


"바다님, 이제 그만

그 포용을 내려놓으셔야겠군요."


집으로 돌아왔고,

오늘은 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쓸 수가 없는 날이다.


대신,
새끼 펭귄에게 말을 걸어본다.


“오늘은 쉬어도 되는 날이야.

그동안 미안했어.”


동그랗고 까만 눈의 새끼 펭귄은

내 말을 이해했는지,

빙하 위에 털썩 앉아

젖은 발을 말렸다.


내일은 글이 써질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새끼 펭귄의 빙하를 출렁거리게 하는

바다의 거친 파도가 멎길 기다려 보자.



토요일 늦은 밤 11시 11분 경,

책상에 엎드려 깜빡 선잠에 들었다.


발을 뽀송뽀송하게 말린 새끼 펭귄이
뭔가를 결단한 다부진 표정으로
내 귀에 속삭인다.


“바다야, 있잖아...

나 결심했오!
억지로 포용하지 않을 거야.
난 아직 주머니가 작거든.
차라리 난 말야..

더 똑똑해질 거야.
더 지혜로워질 거야.
내가 크는 걸 지켜봐 줘!

그리고 오늘은 좀 쉬어~

글은 내가 대신 써둘 게!"


펭귄.png



새끼 펭귄아.. 너 글 좀 쓰는구나? 음냐..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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