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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양 Apr 17. 2024

풀어놓은 보따리

“내어놓으면 치유되는 법”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

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널드 월쉬>






  나는 풀어진 보따리의 힘을 믿는다


  나의 집에는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중 하나는 어머니와 여동생인 유현이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현이가 아주 작았던 꼬맹이 유치원생 시절, 하루는 내일 유치원이 쉴 거라고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꼬맹이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고 귓등으로 들었다.


  아침이 되자 어머니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혀 유현이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한 시간 뒤에 씩씩대며 돌아와 하는 말이, “엄마는 똥멍청이야”였다.


  그날 유치원은 쉬는 날이 맞았던 것이다. 작은 꼬맹이 유현이는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엄마는 이래서 저래서 미워”라고 말하곤 했다.


  유현이가 고3 막바지로 학교 생활에 치이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툭하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이 하는 말에는 시니컬하게 쏘아붙이기 일쑤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는 더 이상 속내를 나누지 않았다. 또한 딱히 이래서 저래서 싫다는 말도 내뱉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다니느라 타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집의 분위기를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종종 어머니와의 통화음 사이로 하소연이 새어 나와, 유현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싸매진 보따리는 무겁고 내용물은 썩는다. 내가 그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했을 때, 언니의 대학을 따라서 왔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먼 타지, 대학 근처에 원룸을 얻어 살았다. 그때부터 근 7년 동안 두 자매의 원룸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활습관이 맞지 않아 자주 싸움을 하곤 했지만 우리는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뭘 했는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가족에게 받은 상처, 좋았던 추억.... 외적인 요소부터 저 깊은 속내까지 다 꺼내어 각자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빠기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마음이 닫혔어. 그래서 잘 지내던 친구들에게 괜히 선을 두게 됐던 것 같아... “와 같은 이야기라던가 ”나는 엄마가 우리랑 상의도 없이 아저씨를 갑자기 우리 앞에 데려온 거에 대해서 너무 상처받았어”와 같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유현이의 상처가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현이가 풀어놓은 보따리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유현이가 그것들을 나에게 꺼내어 보여주기 전까지 나는 그것들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생각은 유현이와는 또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난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됐어. 그래서 응원해 주려고 노력했어 “


  특히 유현이의 풀어진 보따리에서 내가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상처받은 꼬맹이였다. 유현이는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것을 꽁꽁 싸매고 난처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꼬맹이의 존재를 밖으로 꺼내놓으니 꼬맹이는 자연스레 자신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건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현이는 내놓았다. 꼬맹이가 웃을 때까지, 그리고 활짝 만개할 때까지 내놓고 또 내놓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은 한결 부드러워진 유현이를 본다. 한 아이의 애정 어린 엄마가 된 유현이를 본다.


조카는 어여쁘게도 크는 중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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