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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양 Apr 21. 2024

좋아해서 남겨둬야 하는 것

“안개 자욱한 꽃내음”

 



인생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는 것이다.
쓸쓸한 나그네 길의 우의(友誼)도
그저 지나치며 인사하는 것으로,
잠시 동안의 우정에 지나지 않는다.

D. 맬로크 <하루>






  물론 지금의 나에게도 소울친구들이 여럿 있지만 어린 시절 나에게는 정말 단짝과도 같은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혜진이는 예쁘장한 얼굴에 힘이라곤 없을 것 같은 마른 몸을 가진 친구였는데, 그런 외형과는 달리 성격은 당차면서 활기찼다. 나를 주로 리드했으니 말이다. 혜진이와 나는 그야말로 하교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단짝친구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혜진이 네가 멀리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우리의 인연은 짧게 끝이 났지만 그 시절 그녀와 같이 보냈던 시절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처럼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혜진이와 내가 어울린 놀이 장소는 대부분 혜진이의 집이었거나 혜진이 네가 있는 아파트의 놀이터였다. 혜진이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오셨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이용해 혜진이 집에서 자주 머물렀다. 간혹 내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 퇴근하신 혜진이 어머니와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혜진이 어머니는 나에게 꼭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하셨다. 나는 혜진이, 그리고 혜진이 어머니와 마주 앉아 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혜진이 어머니는 나와 혜진이가 어울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 주셨고,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나를 좋아해 주는 어른을 마다할 어린이가 얼마나 있을까. 친구 어머니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어린 나에게 얼마든지 행복한 일이었다.



  “너 누구 편 할래?” 그때 우리의 나이가 8-9살쯤이었으니까,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그렇듯 여자애들 사이에서 편 가르기 싸움이 났다. 주동자는 공부를 잘하고 새침한 윤정이와 내 단짝친구 혜진이었다. 여자애들의 은밀한 기싸움은 역사가 깊은 법이다. 괜스레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를 경계하는 건 나이에 상관이 없는 것이니 말이다.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 전부 같은 질문이 돌았다. 윤정이의 편을 드는 여자애 반, 혜진이의 편을 드는 여자애가 모세 시절 홍해가 갈리 듯 기다렸다는 듯이 기운차게 갈렸지만 나는 쉽게 편을 들지 못하고 고민을 했다. 물론 그 누구보다 내 단짝이었던 혜진이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윤정이가 싫지는 않았고, 또한 배척해야 할 마땅한 이유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인지라 나는 결국 혜진이 편에 서서 혜진이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내내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고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혜진이와 나는 그렇게도 다른 친구였다. 혜진이가 야무지고, 제 목소리를 잘 내고, 하고 싶은 것을 당당하게 해내는 친구였다면, 나는 내성적이고 조용히 있는 것을 선호했으며 평화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함께 보낸 우리의 놀이시간은 항상 즐거웠다. 도로 공사를 위해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멘트 굴뚝 하나로도 몇 날 며칠은 놀 수 있었으니, 매일매일 할 놀이가 가득 한 그때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랬던 혜진이와 헤어져야 하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그 뒤로 나는 혜진이처럼 매일 붙어 다닐 정도의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만약 지금에 와서 혜진이와 내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아니, 서로를 알아보기는 할까? 나는 종종 나의 단짝이었던 혜진이가 그립지만 그 시절에 남아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새로 지어 들어간 나의 시골집은 계절마다 색다른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특히 나의 뇌리에 근사하게 남아있는 건 아침에 본 능소화이다. 9월이 되면 거실의 큰 창가 앞에는 붉은 능소화가 축 늘어선 가지들 사이로 탐스럽게 피었는데, 그 자태는 아침이 되면 최고의 경관을 이뤘다. 안개 사이로 촉촉한 이슬비를 머금은 능소화의 자태가 다른 세상에 초대된 듯 가히 신비롭기도 했고, 여인의 부드러운 선처럼 고왔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오빠로 바뀐 뒤부터는 그 능소화를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안에 잠재된 그리움 속에서 능소화는 지금도 여전히 붉은빛으로 빛나고만 있을 뿐이다.


  어릴 적 내 단짝친구 혜진이와 어린 시절 집에서 즐긴 능소화의 자태는 내 안의 그리움으로 남았고, 그 그리움을 꺼내어 볼 때마다 안개 자욱한 꽃내음이 묻어난다. 그건 왜인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기에 더 향기로워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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