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야 할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의 차이.
매트릭스
아들이 유튜브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줄거리를 보고 나서 '매트릭스'를 보고 싶다고 며칠을 졸랐다. 이미 본 영화였고 큰 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있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지못해 함께 보려고 둘러앉았다. 영화를 보면서 아들보다 남편과 내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매트릭스가 폭풍처럼 유행하던 1999년은 여러 언론 매체가 주입하는 대로 정보를 입력하던 막바지 시대였다. 당시 매체들은 이 영화를 슬로모션 촬영기법과 꽃미남 키아누 리브스의 현란한 액션 연기에 초점을 맞춰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있는 이 영화의 이미지도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SF 판타지 영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실 엄청난 비밀을 풀어헤친 철학 영화였다. 20년 동안 온갖 책을 파서 알아낸 진실들이 이 영화 한 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편과 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시 매체들은 이런 진실을 대중이 제대로 이해하고 자각하기라도 할세라 영화의 현란한 기술과 배우의 화려한 미모의 이미지만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 전략은 나와 남편에게는 정확하게 통했다. 주인공 네오가 선택하는 빨간약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시종일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가야 할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내가 선택하고 두려움이나 의심 불안함 없이 내 의지로 길을 걸을 때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뀐다고...
우리가 선택한 '시작'
매트릭스의 네오는 거의 죽다 살아나서야 각성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아주 가까운 친지, 지인들 중 누구 하나 우리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았다. 무모하고 겁 없는 선택을 진심으로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측 가능한 파란 약의 미래 대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빨간약을 선택한 것이다.
남편은 퇴사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원 없는 휴식기를 가지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퇴사한 바로 다음 날부터 남편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여기저기에서 퇴사 소식을 전해 들은 거래처에서 아주 여러 방면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런 전화는 퇴사 후 두세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다. 남편 역시 이런 상황이 믿기 힘든 눈치였다. 상상도 못 했던 방향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보내며 남편은 그동안 헛소리로 치부했던 시크릿 계열의 책에서 한 말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버렸다. 그 수많은 제안들에 현혹되지 않고 남편은 원래의 목적대로 당분간은 집에서 쉬면서 적당히 일하는 쪽을 선택했다. 일하는 시간은 파격적으로 줄었지만 남편의 수입은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2.5배로 껑충 뛰었다. 그 시기 남편과 나는 매일 마주 앉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며 방방 뛰었다. 남편은 한 달에 10일도 채 일하지 않았다. 분명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수입은 더 많아졌지만 일을 하지 않는 동안은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불안함을 극복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어떤 결정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우린 그 힘든 처음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우리 발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발 한발 내디디며 그때그때 주어지는 숙제를 해나가면 되니까.
매트릭스는 네오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 난 미래를 모른다. 이것이 어떻게 끝날지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시작할지를 말하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