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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크레용 Sep 12. 2021

10. 전 재산 2억. 외벌이 남편을 퇴사시켰다.

10. 변화

10일 정도의 연휴는 긴 명절 연휴나 여름휴가에서도 종종 경험했었기 때문에 퇴사 후 보름 정도까지는 우리 모두 큰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우리의 생활은 아주 작은 변화를 시작으로 조금씩 조금씩 계속 달라지기 시작했다. 


입맛의 변화

남편의 퇴사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인 일상은 '밥'이다. 입맛을 되찾은 장정 하나가 더 늘어난 우리 집 식비는 40% 이상 늘어났다. 남편은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동안 음식 맛을 즐길 여유도 없었던 남편은 마치 이유식을 갓 지난 아기처럼 닥치는 대로 음식 맛을 보며 즐거워했다.

남편이 젊은 시절 가장 좋아하던 메뉴는 돼지국밥이었다. 첫 데이트에서 함께 먹었던 메뉴도 돼지 국밥이었을 정도였고, 전국의 돼지국밥 맛집을 찾아다닐 정도로 돼지국밥에 진심이었다. 그런 남편이 퇴사 하기 1년 전부터 이상하게 돼지국밥만 먹으면 식중독 증상이 나타났다. 돼지국밥만이 아니라 돼지고기가 들어간 고기국수 같은 것은 냄새 때문에 아예 입에 대지도 못했었다. 아마도 혈압이 높아진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퇴사 후 한 달이 지나자 다시 돼지국밥, 고기 국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돼지국밥은 시작에 불과했다. 신혼 때에도 둘이서 외식을 하면 성인 두 명이 2인분의 음식을 모두 다 먹은 적이 없을 정도로 남편은 성인 남성의 적량을 다하지 못했다. 그런 남편은 늘 "더부룩하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퇴사 후 한 달이 지나자 눈만 마주치면 "배고프다"라고 말이 뱉어냈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숟가락을 들어도 밥 두 그릇은 그냥 먹어치웠다. 



일상의 변화

남편의 꿈은 '좋은 아빠'다. 꿈에 걸맞게 남편은 아이들의 성장의 한 순간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매일 1-2시간은 꼭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고, 주말 이면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던 곳을 나들이했다.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모든 휴가는 학예회나 운동회, 학부모 공개 수업 같은 아이들 학교 행사만 사용해 왔었다. 이미 충분히 좋은 아빠인 남편이지만 아직 하나의 로망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등하교를 하는 아주 소박하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었던 일. 이제 그 로망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아쉽게도 큰 아이는 엄마 아빠 손을 놓은 6학년 형아가 되어버렸지만 우리에겐 아직 7살 딸이 남아 있으니 아주 늦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매일 아침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딸아이 손을 잡고 문구점이며 편의점을 들렀다 오는 극강의 행복한 하원길을 함께하고 있다. 


나에게 시작된 변화

남편이 퇴사하기 전까지 나는 대부분의 엄마들과 비슷비슷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아침밥을 차려 먹이고, 큰 아이 준비시켜 학교에 보내고 우리 집 막내인 보더콜리 루이와 둘째의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30분 정도 루이의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다.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아침 부엌을 정리하고, 청소, 빨래까지 마친 뒤 겨우 커피를 한잔 만들어 블로그 포스팅을 했다. 욕심만큼 다하지 못한 블로그 포스팅 하나를 겨우 올리고 시계를 보면 벌써 병설 유치원의 짧은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코 앞이다. 허기가 밀려오지만 마땅한 요기를 하지 못하고 분리불안으로 집에 혼자 있지 못하는 루이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향한다.  

유치원 친구들과 헤어지는데만 3-40분은 걸린다. 겨우 겨우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3-4시. 아이들 간식을 만들어주며 그제야 남은 간식으로 늦은 점심의 허기를 채운다. 개를 키우면 하루 2-3번의 청소도 모자란다. 다시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들 공부를 좀 봐주다 보면 6시. 남편은 어김없이 7시면 집에 도착한다. 이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남편과 함께 저녁상을 물리고 아이들 씻기고 나도 씻고, 보드게임이라도 한번 하고 책 몇 권 읽어주고 각자의 잠자리로 돌려보내고 나면 시간은 벌써 10시.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 리스트에 올려둔 책 한 권 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일상이 종종 버겁기는 했지만 워킹맘과 비교하면 아이들에게 충분한 케어를 해 줄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가뿐 숨을 삼켰었다. 

남편이 함께하는 집에서의 일상은 정말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다. 사실 회사에 다니기 전에도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에 적극적이던 남편이라서 한동안은 내 일이 덜어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읽고 싶었던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며 조금 더 정성 들여 포스팅을 할 여유가 생겼다. 함께 점심을 먹을 친구가 생겼고, 저녁이면 내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까지 생겼다. 나에게 생긴 이 여유는 아이들에게 더 크게 전해졌다. 책임감과 스트레스에 갇혀 어느 정도의 강박, 어느 정도의 분노조절장애가 주기적으로 아이들에게 분출되기도 했었는데 그 빈도와 강도가 놀랍게 줄었다. 평소 같으면 짧은 고함으로 던져 버리던 말을 앞뒤 설명을 붙여가며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다. 피부가 좋아지고 부기가 가라앉았다. 표정이 밝아지고 말수가 늘어났다. 남편의 번아웃만 걱정했었는데 사실은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상태였었던 거다. 




우리의 일상에 찾아온 여유는 그동안 숨 쉬고 봐 오던 같은 공간에서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처럼 늘 보던 창밖의 풍경이, 아이들이, 새소리가, 빗물까지 다르게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눈부셨고, 아름다웠다. 깨어있는 하루의 80% 는 아주 좋은 상태의 기분이 유지되었다. 이런 기분이 수많은 책에서 읽어오던 '기분이 운명을 결정한다.'라고 할 때 말하는 그 좋은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분이 유지되는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남편에게도 좋은 일들이 매일매일 쏟아졌다. 남편이 퇴사를 하면 내가 버는 최저생계비로 알뜰살뜰한 베짱이처럼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남편의 손에도 남편이 알지 못했던 것들이 잔뜩 쥐어있었다. 남편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고 남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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