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을 끝으로 5개의 프로그램을 올리고 퇴사를 했다. 일찍부터 인턴, 계약직 등 여러 형태로 회사를 경험해 봐서인지 벌써 4번째 퇴사였다.
2023년 2월, 회사에 정규직으로 첫 입사를 하면서 꿈꿔왔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애정과 열정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보람과 의미를 많이 느꼈지만 또 소모되기도 했다. 처음 해보는 일,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답지 못했다. 작은 조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혼자 도맡아서 하다 보니 어디까지가 내 업무영역인지 모호해졌고, 그 안에서 또 좋아하는 일들을 따라갔지만 모르는 분야도 너무 많았다. 특히나 공연이 그랬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새로웠고, 우리 프로그램의 관객들을 만나는 게 설레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공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각자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매주 주말 출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내 상태를 돌아보려고 했다. 자칫 애정에 너무 잠식되어 나를 챙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돌아보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졌다. 그렇지만 시간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왕복 3시간 가까이 출퇴근을 하는 나로서는 내 시간의 여유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항상 도전하고 성장하는 걸 즐기던 나였지만 회사생활 2년 차에 되자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갓 신입 딱지를 뗀 2년 차의 업무 이해도가 높지 않겠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내가 배운 건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닌 밀도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안정기였던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정기는 나에게 '권태'로 다가왔다. 더 이상 하는 일이 설레지 않았고, 회사의 시스템은 너무나 비효율적이었으며,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받지 못했다. 일이 익숙해지면서 더 성장하기보다는 제자리에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성장 곡선을 그리던 나의 그래프가 잠시 멈춘 것 같다고 느껴졌다. 애정과 열정만으로 일하던 시기가 지나니 현실적으로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단점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말 애정으로만 돌아가는 회사야. 국장님이 퇴사할 때 회사가 돈이 있거나 시스템이 있거나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없어서 퇴사한다고 했거든. 나에게는 둘 다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치라 신기했어. 지금의 나는 오로지 나의 의미와 재미인 것 같아"
"애정이 빠지면 너도 현실적인 것들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럼 더 있을 이유가 없어질 테고"
돌아보면 나는 퇴사를 결정하는 순간이 '회사에 정이 떨어질 때'였던 것 같다. 누군가는 회사는 회사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였다.
"나는 사실 CJ 퇴사할 때 사람들이 너무 열정이 없고 더 이상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여기는 그래도 다들 애정이 보이거든. 이렇게 자발적으로 주말에도 나오고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도 보이고. 그런데 이렇게 행정적으로 태클이 걸릴 때 정이 떨어져"
"확실히 현장이랑 차이가 많이 나긴 하네"
"맞아 이렇게 융통성 없고 보수적일 수가 없어"
나는 왜 그토록 방송을 좋아했고, 콘텐츠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콘텐츠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작은 드라마였고, 각자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위로가 되는, 또 감동이 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기여한다는 것 자체가 설렘이고 보람이었다.
"너에겐 이젠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게) 일상이 된 게 신기해. 그런 삶은 또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
좋아하는 게 일이 되는 삶에 난 만족했다. 그만큼 좋아하는 일에 깊이가 있어진다는 측면에서 나에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걸 오래 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나를 소진하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오래오래 할 수 있는 방법'
"본질적으로 이 업계에서 롱런하려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걸 알면 내가 하는 일에 권태감을 덜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더라고요.
그 힘으로 커리어가 한층 더 성장하고요. 그 첫 시작이 기록이에요."
- 마케터 이승희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