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식구(食口) 그리고 소) 우리 식구(食口) 그리고 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부모님은 나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당시 우리나라 전체가 못 살고, 못 먹고, 헐벗는 암담한 시절이었고, 위로 누나가 둘이고, 형이 넷이나 되는데 왜 어머니 아버지는 산 입(식구:食口) 하나를 추가했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그 해 극심한 가뭄이었다. 어머니가 보릿고개를 넘기는 동안 태아도 배를 곯았고, 세상에 나와 보니 어머니 젖은 이미 가뭄에 바짝 말라 있었다. 분유도 없었기에 쌀가루를 갈아 만든 암죽을 누나들이 교대로 떠 먹이려 했지만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그저 힘없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핏기 없이 축 쳐진 영아를 안방 윗목의 볏짚 위에 눕혀 놓고 정화수 한 그릇 떠와 열심히 천지신명에게 실성한 듯 빌었다고 큰 누나가 슬픈 전설처럼 말해주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팔자가 질겨서 인지는 몰라도 나는 살아났다. 대여섯 살부터 열(10) 식구의 일원으로서 밥값을 해야 했다. 내게 주어진 일은 부모님과 누나가 들일을 나간 사이 빈집을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 시골에는 좀도둑도 많았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구걸하는 거지들도 많았다. 깡통 찬 거지들은 사립문 간에 와서 밥 좀 달라고 소리치다가 아무도 없으면 흰 고무신이나 빨래를 슬쩍 집어 가곤 했다. 팔에 손가락 대신 갈고리를 찬 상이군인 아저씨들은 더 무서웠다. 그들은 밥이 없다고 하면 뾰족한 쇠 갈고리 손을 번쩍 들어 위협했다. 어린 내가 그들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으면 가져가던 흰 고무신을 겸연쩍게 토방에 내려놨다. 그리고 우물로 가 타래박으로 물을 길어 꿀꺽꿀꺽 마시고는 그 타래박을 우물 속으로 홱 집어던지고는 가버렸다.
거지가 간 후 까치발을 하여 우물 속을 보면 흰 구름이 파란 하늘에 유유히 흘러간다. 우물 속의 구름 한 점이 흘러가 없어지면 하늘을 보고 또 다른 구름이 우물 속에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큰 구름은 늘 남쪽의 오서산을 넘어서 우리 집 쪽으로 왔다. 저 큰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구름이 걸쳐 있는 산 너머에는 어떤 동네가 있을까? 거지들이 득실거린다는 쪽다리 밑이 거기 있을까? 왜 나는 쪽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고 누나들은 웃으면서 말하는지 정말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 어릴 적의 일상이 방랑, 더 나아가 자유에 대한 갈망의 시작이 된 것 같다. 지루한 시간 끝에 소의 딸랑딸랑 방울(워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점심때가 되어 돌아오시고 있었다. 집에 오면 소는 제 방(외양간)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사람보다도 제일 먼저 소 밥을 챙겨 주었다. 힘든 일 하고 들어온 소를 배려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얼른 먹고 오후 들일 나가기 전에 낮잠 한 숨 자라는 배려였다.
어렸을 적의 우리 소는 늘 암소였다. 황소가 힘도 세고 일을 잘하겠지만 다루기 힘들고, 송아지 낳는 일도 없으니 아버지는 암소가 늙어서 더 이상 쟁기질을 못할 때까지 식구로 대접하셨다. 1960년대 소는 농가의 재산 목록 제1호였다. 얼마나 큰 재물이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속담까지 생겨 났을까? 말이 가축이지 소는 한 식구였다. 가장 힘센 일꾼이고 매년 송아지를 한 마리 낳아서 부모님께 목돈을 쥐여 주는 화수분이었다. 그 목돈은 형의 대학 등록금이었으니 대학이 상아탑(象牙塔)이 아니 우골탑(牛骨塔)이었음을 나중에 이해하였다.
식구라는 한자가 먹을 식(食)에 입 구(口)이니 같은 솥 밥 먹는 단체의 구성원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머니나 누나는 밥을 하기 위해 쌀과 보리를 씻는다. 그 뜨물을 절대 수채 구멍에 버리지 않았다. 부엌 앞에 있는 큰 오지항아리에 모아 둔다. 식사 후에 설거지하면 나오는 구정물 또한 버리지 않고 모아 둔다. 그 구정물에는 가끔 밥풀 대기도 있고, 김치 쪼가리나 나물 줄기도 들어있다. 우리가 먹던 음식을 소도 먹었다.
나는 소의 그 순하고 까만 눈 그리고 긴 속눈썹이 좋았다. 외양간 앞에서 그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초등 5학년 때부터는 쇠죽 담당을 자청했다. 추운 겨울날 저녁에는 모아둔 구정물을 큰 가마솥에 붓고 여물과 쌀겨를 한 바가지 넣어 끓이기 시작한다. 준비는 이렇다. 먼저 왕겨 간에서 왕겨 한 삼태기 반과 짚 섶 반 단 정도를 사랑방 아궁이 앞에 가져온다. 라디오를 가마솥 옆 부뚜막에 놓고 볼륨을 최대화한다. 오후 5시 어린이 방송의 경쾌한 시그널 뮤직을 들으며 쇠죽을 끓이기 시작한다. 먼저 풀무를 아궁이 앞에 놓고 홈통(쇠 파이프)을 풀무의 바람이 나오는 구멍에 연결한다. 아궁이 안 중앙에서 풀무 바람이 올라 나오게 홈통을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짚을 놓고 통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불타는 짚 섶 위에 왕겨를 왼손으로 한 줌 한 줌 집어던지고, 오른손으로는 슬슬 풀무를 돌려 왕겨 밑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왕겨도 제법 은근한 화력을 낸다. 이렇게 한 삼태기 반의 왕겨를 태우면 쇠죽이 끊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쇠죽을 조그만 쇠스랑으로 퍼서 구유에 담아 준다. 암소가 뜨거운 쇠죽을 후후 불며 먹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했었다. 우리 암소는 어린이 방송을 틀어 놓는 순간부터 자기 밥을 짓고 있는 나를 등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면 어서 빨리 달라는 듯 머리를 한 번 치켜든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도 했다.
아버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속담이 무슨 경계를 주는 지도 알고 계셨다. 외양간은 사립문 안의 사랑방 문 바로 앞에 있었고, 소는 놋쇠로 만든 워낭을 목에 달고 있어서 밤에도 외양간의 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어서서 여물을 먹고 있으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4분의 4박자로 생생하게 들렸고, 누워서 되새김을 하고 있으면 더 늦고 약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으며, 등에나 파리를 쫓거나 간지러워 등이나 머리를 벽에 비비면 빠르고 큰 딸랑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났다. 한 밤중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소피보러 나간 김에 외양간을 꼭 쳐다본다. 그러면 소는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채고 어둠 속에서도 머리를 한 번 흔들어 방울 소리를 내어 안심하게 했다.
여름에는 더우니 쇠죽을 끓이지 않는 대신 싱싱한 풀을 베어 와 작두로 잘게 썰어서 구정물에 타 준다. 여름날 오후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여 떨어지기 시작하면 나와 형은 각각 숫돌 앞에 쭈그려 앉아서 낫을 갈기 시작한다. 숫돌이 마모되면서 생기는 열기를 식히고자 낫에 물을 뿌리면서 쓰윽~쓱 쓱 반복하여 밀다 보면 어느새 날이 하얗게 선다. 손가락을 날 끝에 대고 살며시 당겨 볼 때 까칠함이 느껴지면 합격이다. 그 낫을 바지게에 싣고 꼴을 베러 나가는 데 문제는 소가 좋아하는 풀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논두렁 안쪽의 연하지만 흔한 쇠비름은 비려서, 물가의 갈대, 산의 억새 그리고 그 흔한 개망초는 잎이 억세고 줄기가 너무 딱딱해서, 밭둑의 쑥은 진한 냄새 때문에 소가 좋아하지 않는다. 소가 좋아하는 풀은 잎이 많고, 연하고, 향기롭고, 물기가 많은 것인데 그런 것들은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아니 있었겠지만 이미 손 빠른 어른들이 다 베어 갔다. 가까스로 소가 좋아하는 밭두렁이나 언덕의 꼴을 한 바지게 베어서 사립문을 들어오면 소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고개를 들어 우릴 환영했다. 그때 만족해하는 소의 눈을 보며 좋았다.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우리 식구는 오곡밥에 각종 나물을 먹었다.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놓은 광천 김의 높이가 내 팔목 길이 정도 되었지만 오곡밥에 다 싸 먹었고, 또 귀밝이 술로 맑은 동동주를 아침부터 마셨다. 소도 같은 식구였으니 당연히 그날은 특식을 먹었다. 쇠죽 외에 함지박에 온갖 나물을 주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친 후 아버지는 막걸리를 유리 댓 병에 담아 꼬뚜레를 잡고 소의 입을 추켜올린 후 입에 물렸다. 그러면 소도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흐뭇하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