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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21. 2021

소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순간을 믿어요

대학시절 좋아했던 노래가 있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순간을 믿어요’ 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던 시절, 과거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를 잡았던 것은 ‘순간’이라는 단어였다.      

그래서 ‘순간을 믿어요’ 라는 노래가 좋았다. ‘I saw something.’ 이라고 부르는 상큼한 멜로디가 좋았고,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라는 가사가 좋았다. 도토리를 모았던 당시 사이좋은 홈페이지의 bgm으로도 이 노래를 골랐다. 

그래서 그 멜로디, 그 소리가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0년도 더 지나 불현 듯 그 소리가 떠오른 것은 어느 예기치 못한 저녁이었다. 나는 그 노래와 그 가사와 그 가수를 모두 잊고 지냈는데, 그 노래가 화두였던 시절은 이미 지났으며 그 노래보다 더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많이 발견했던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억 한 켠에 저 멀리 쌓여져있던 희미한 20대의 방황 속에 꽁꽁 묻어놨던 노래를 바로 어제 들었던 것처럼 흥얼거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이라는 산문집과 함께 왔다. 그 책의 저자는 ‘I saw something.’을 부른 그 밴드의 보컬이었고, 그러니 그가 하는 말들을 따라가보다보니 기억 한 켠에 재워져있던 ‘I saw something.’이 생생하게 생각난 거였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최근 내가 읽었던 가장 마음을 울린 책이었다. 

뭐 거창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저자의 마음 상태나 상황을 매우 솔직하고 정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42세의 주인공도 32세의 의사 선생님도 아닌 내가 굉장히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물론 글쟁이로서의 각색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책에서 날 것의 소리를 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이 커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 그 둘이 기형적인 사랑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서로의 인연이 닿음을 확인한 순간 확실히 멀어져버리고 만 그 먹먹한 이야기에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날 것의 소리가 들렸다. 그건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내가 했던 짓들, 보고 들었던 짓들과 닮아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감정의 스펙트럼이란 대게 비슷한 거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요즘이었다. 순간순간에 매몰되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날들이 계속됐다. 

20대의 나는 과거와 미래밖에 보이지가 않아 ‘순간’이라는 단어라도 잡고 힘겹게 버텨야 했는데, 30대의 나는 순간밖에 보이지 않아 과거나 미래를 그릴 수 없다. 

삶이 내게 요구하는 게 점점 많아지고 있고, 아무도 그것을 부여잡고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그 요구사항들을 스쿼시하듯이 쳐내고 또 쳐내길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 하나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동료가 건넨 “술술 읽혀요. 정말 좋아요.”라고 한 책 한권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보이는 ‘이야기 산문집’이라는 타이틀을 단 그 책이 나에게 ‘순간을 믿어요’라는 노래를 떠올리게 했고 그건 단숨에 내 마음을 쓸모없는 시간-과거-에 머무르게 했다.      


소리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보통 ‘향’도 그렇다고 하지만 소리도 만만치않다.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그 소리의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나는 책에서 저자의 소리를 들었고, 저자의 소리는 나를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데려갔다. 그건 내가 잊고 지냈던 나의 일부였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순간에 머무르자 현재의 순간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마치 색의 대비 효과 같은, 보색 같은 거였을까.      


우리는 수많은 도시의 소음에 싸여 살고 있지만, 모든 소리가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누구나 나의 시절을 함께하는 특별한 소리를 골라 데리고 살고 있다. 10여년 전의 나는 그게 ‘순간을 믿어요’라는 노래였고 ‘I saw something’이라는 보컬의 목소리였다. 5년 전에는 “나는 00씨의 미래가 기대돼”라는 한 관대한 상사의 말이 나를 살게 했고, 시기를 특정할 수 없지만 어떤 (신앙적) 믿음의 소리도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지금 나를 살게 하는 소리는 내가 낭독하는 소리 또는 듣고 있는 모든 오디오북의 소리다. 

아마 또 10여년이 흐른 뒤에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그 때 그 순간’의 기억이 순식간에 떠오를 것이다.      


미래에 떠오른 지금의 기억은 팍팍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정신없이 세상의 요구에 맞춰 살았다고 해도,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라는 쓸데없는 책 한 권과 눈 맞췄던 하루가 있었음을,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남의 이야기에 빠져든 어떤 하루가 있었음을, 그래서 나의 예전 소리들에 귀기울이고 보듬을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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