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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22. 2021

내게 찰떡인 오디오북

내 거 하자

 한동안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의 머리 모양만 쳐다본 적이 있다. 한창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저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구나 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즈음 스타일링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영상도 많이 봤다. 얼굴의 중안부(눈썹에서 코끝까지의 거리)가 긴 사람이 어떤 스타일링을 하면 좋은지, 입이 작은 사람에게는 어떤 스타일링이 좋은지, 목이 짧고 얼굴형이 육각형인 사람에겐 어떤 게 좋은지 등등을 사례별로 볼 수 있었다. 그 사례를 다 보고 내린 결론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였다. 그 영상 속 유튜버는 “모두 각자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오프닝을 했다. 결국 오프닝과 결론은 같았다.  

    

보통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가 예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자기한테 찰떡인 머리가 있다. 장도연과 고준희는 숏컷을 해야, 한지민은 중단발을 해야 장점이 산다. 현아는 진한 색의 앞머리가 안 어울리고, 윤아는 턱 선의 칼 단발이 안 어울린다. 각자 타고난 체형과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스타일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디오북도 그렇다. 책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나 분위기가 다르다. 문체도 다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다르다. 따라서 오디오북을 만들 때도 그 책의 글맛을 잘 살릴 수 있는 북나레이터를 선정하는 게 중요하다. 책과 북나레이터의 궁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정혜신 작가님의 ‘당신이 옳다’와 사유리 님의 ‘니가 뭔데 아니 내가 뭔데’를 녹음하고 싶었었다. 책 내용이 좋아 인상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옳다’는 진짜 밑줄을 몇 번이나 긁고 싶었을 정도로 따뜻했고, 사유리의 책은 평소 엉뚱하게만 생각했던 연예인의 인생 철학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통쾌하고 예리해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오디션을 준비할 때 작가들이 평소 말할 때 어떤 말투와 목소리를 쓰는지 여러 번 돌려봤다. 그 목소리와 닮은 느낌을 흉내내려고 했다. 정혜신 작가님은 약간 빠른 말투에 조금 들뜬 호흡이 있었고, 사유리 님은 엉뚱하고 발랄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 느낌을 조금 흉내내어 오디션 파일을 제출했다. 그 책들의 북나레이터가 되고 싶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떤 부분이 부족했을까 싶어 관계자분께 여쭤본 적이 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서별로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어요.” 라는 답이 왔다.      


그렇다. 목소리는 지문과도 같아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책이 모두 다르듯이 책에 어울리는 목소리도 다 다르다. 같은 사람이 여러 책을 녹음했다 하더라도 자세히 들어보면 목소리 톤이나 느낌이 살짝 다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책마다 다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어찌 같은 목소리로 그걸 읽을 수 있을까. 책마다 어울리는 소리가 있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들이었지만 내가 잘 표현할 수는 없었던 책이라는 게 씁쓸하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그건 타고난 내 특성과 기질 안에 그 책들과 공명하는 부분이 별로 없었단 뜻이었다. 반대로 책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으면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실제 내가 녹음했던 것들은 누군가를 흉내낸 적이 없다. 작가가 어떤 말투로 말을 하는지 찾아본 적도 없었다. 그냥 내 안에 있는 책 속 마음결을 꺼내기만 하면 되니까. 그건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거여서 자연스럽게 들춰보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노력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책을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베스트셀러고 남들은 다 좋다는데 나는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이 있으니까. 반대로 한쪽 구석 먼지 쌓인 책이 꼭 내 것인 것만 같아 사게 되는 책도 있다. 

인기가 없어도 유독 마음에 끌리는 책,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낭독도 그렇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 작가와 내가 마치 하나 된 듯한 느낌,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떨 때는 내가 쓴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떨 때는 평소에  작가가 이런 말을 하고 있겠구나 싶은 느낌 같은 그런 게 있다. 

그런 책은 ‘내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찰떡같이 소화할 수 있겠다 싶다.      


그건 아마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일 것이다. 책에도 고유의 기운과 영혼이라는 게 있는데 마치 그 영혼에 내 안의 어떤 부분이 닿는 것이다. 

이때 목소리가 좋고 나쁘고는 다른 영역이다. 얼마 전 어떤 오디오북 샘플을 들었는데 목소리가 참 예쁘고 좋았다. 하지만 그 책에서 느끼고 싶은 감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목소리는 계속 듣고 싶었는데 그 오디오북을 계속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껐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는 참 청순해보이고 예쁘다. 하지만 머리카락만 그럴 수도 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얼굴형과 이목구비,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헤어스타일은 의미가 없다. 내게 맞는 찰떡 헤어스타일이 있는 것처럼, 책에도 찰떡처럼 맞는 북나레이터가 있다. 그건 아마 책에 담긴 영혼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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