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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Sep 22. 2021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이토록 힙한 이별이라니

처음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시집을 봤을 때 나는 시가 마치 ‘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과, 두 번째는 얼핏 봐서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사고의 흐름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시는 행과 연이 명확히 구분된 시였다. 교과서에서 ‘해야 솟아라’ 같은 구절로 시작되는 연이 없는 시도 보긴 봤었지만, 그래도 그 시는 쉼표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내가 지금까지 익숙했던 시는 감정과 메시지의 전달이 명확히 드러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였다. 윤동주의 시, 서정주의 시, 김춘수의 시 같은 서정적이고 또렷하고 맑은 시들 말이다.     


하지만 이 시들은 참 이상해보였다. 익숙했던 형식과 내용, 감정선이 모두 파괴되고 다시 독특하게 짜여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게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진다면 내가 제일 잘 표현할 수 있겠다고. 나만큼 이 이상한 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내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틀을 이렇게까지 잘 따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지만 혼돈과 자유를 사랑하고 갑갑한 걸 참을 수 없어하는 이상한 사람.

그래서인지 그 시집 속 시들의 언어가 내 속으로 참 잘 들어왔다. 그리고 시인님이 왜 이렇게 썼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오디션 이후, 나는 그 시집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네 번 이상 읽었다. 눈으로 마음으로 입으로.

처음에는 그저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후 시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마음이 들어왔고 그것은 가슴을 울렸다.

이별 내용이었다. 연인의 헤어짐도 있었고, 은사와의 헤어짐도 있었고, 가까운 친구와의 헤어짐도 있었다. 어린 시절 옆집 살던 아이와의 헤어짐도 있었다.

그 안에는 사람이 숙명처럼 겪어야 하는 사별이 있었다. 쉼표도 점도 없는 문장들 속에서 김민정 시인님이 겪어야 했던 이별이 고단하지만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시니컬함과 유머도 잊지 않았다. 물론, 욕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랩 같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빠르게 말했다. 쉼표도 마침표도 없는 시가 많으니 최소한으로 쉬었다.

하지만 담당자분이 일반 시처럼 읽어주길 원하셨다. 조금 천천히, 잘 쉬어가면서. 전달력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으로 낭독했다.

겉으로 표현된 단어가 다소 거칠더라도 그 안에 담긴 두부같은 마음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별에 시니컬한 이유는, 어쩌면 만남과 인연에 매우 큰 소중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두워보이는 시들에도 사랑이 조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녹음했다. 시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조금씩 달라서 매 시마다 다른 느낌으로 낭독했다.    

 

꼭 울어야만 슬픈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웃고 있는데 슬퍼보이는 사람도 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당사자가 겪고 있는 감정의 깊이를 전부 헤아릴 수는 없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는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조차 없는 크고 작은 이별들이 훅 하고 삶에 들어올 때면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라고 읊조려도 괜찮을 것 같다. 

헤어짐 속에도 사랑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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