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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Sep 23. 2021

첫 오디오북, 라면 100개 끓이기

이게 왜 다르지?

라면은 참 맛있다. 자작하게 물을 붓고, 다시마, 버섯, 새우 가루를 넣고 스프를 턴다. 파 쫑쫑, 양파 껍질 벗어서 썰어넣고, 김치국물도 좀 넣고, 그 다음에 면을 반 쪼개 투하! 

가끔 계란을 풀기도 하는데 많이 섞지 않고 계란이 국물 맛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조심히 둔다.      

혼자 먹을 땐 그렇게 끓인다. 그런데 만약 혼자가 아니라 100명을 위한 라면을 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냄비에 물 양을 1인분의 100배로 맞춰 넣어야 하는가? 계란은 100개를 푸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이건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험실의 1cm x 1cm 면적에서 1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실험이, 면적을 열 배, 스무배로 키웠을 때 결과도 열 배, 스무배로 나오지 않는다. 

스케일이 커질수록 변수가 많아진다. 그래서 논문에 나온 기술이 바로 상용화에 적용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낭독도 그렇다. 첫 오디오북을 할 때 알게 됐다. 오디션용 5분짜리 녹음과 3시간 50분짜리 완독 녹음은 달랐다.

처음 오디션용 파일을 녹음할 때는 수도 없이 녹음해서 가장 괜찮은 버전을 찾아냈다. 골라낸 버전은 스스로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관계자분도 “이렇게만 해주면 된다. 나무랄 곳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무랄 곳들도 생겼다. 이상하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5분 짧은 시간의 2~3페이지 정도 글은 잘 소화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말하고, 저 문장은 저렇게 말하겠다는 촘촘한 계산으로 여러 번 실전 녹음해서 베스트를 찾았다. 


그러나 246 페이지의 책 한 권은 오독을 걸러내기에도 바빴다. 그럴 에너지도 시간도 없었다. 단순히 물리적 분량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연습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라고 믿고싶다.. 


스케일이 커지면서 여러 변수가 생겼겠지만 그 중 큰 변수는 마이크 앞에서 하는 실전 녹음이 여러 번이 아니라 딱 한 번이었다는 것일 것이다. 

긴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흘러간 강물처럼 한번 낭독한 곳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마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2회차가 없다. 물론 두 번째 사는 것처럼 훌륭하게 사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전이 오직 한 번 뿐이라 당황스럽고 서툴다. 그 실전이 끊김없이 주욱 이어져 있다. 여러번 반복해서 최고를 뽑아내는 5분짜리 파일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 긴 호흡의 3시간 50분짜리 낭독과 비슷한 것이다.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이어지는 서사. 


그래도 낭독은 잘못 읽었을 때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러 번 반복해보면 가장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기회는 없다.      


그렇다면 짧은 분량에서의 퀄리티가 완독본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보 낭독자라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흘러가버리는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여러번 반복해 최선을 다해 문장 하나의 느낌을 찾아내듯이, 단 한번의 실전에서도 문장들의 느낌을 순간순간마다 찾아가려는 연습이 필요하다. 

인생 1회차에서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하듯이,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힘이 낭독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라면 100개 끓이기는 어떻게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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