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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15. 2021

적면공포증이 뭐에요?

문제는 두려움!

“어떻게 그렇게 목소리가 안 떨릴 수 있어요?”

가끔 공식 행사에서 사회를 본다. 그 때 그런 소리를 듣는다. 

“하나도 안 떠는 것 같아요. 차분해보여요.” 

하지만 나는 원래 무대공포증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내게 주목이 집중되면 얼굴이 빨개지는 병 아닌 병이 있었다. 꼭 큰 무대가 아니라 4~5명만 모인 자리에 가도, 꼭 자기 소개를 할 타이밍이 오거나 내 이야기를 할 때가 되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원래 여드름 흉터가 있어 혈관이 쉽게 확장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얼굴에 닿으면 심박동이 빨라지면서 미세 혈관이 수줍음을 타고 한껏 존재감을 내뿜으며 커졌다. 불타는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이 스스로도 화끈화끈 거렸고, 누군가는 꼭 ‘어? 얼굴 정말 빨개졌다.’고 말을 했다. 얼굴에 피가 나는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스스로 그 모습이 싫었다. 내 표정과 심리 변화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게 싫었고, 볼터치한 것도 아닌데 빨개지는 게 싫었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자아상은 ‘사람들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어디서나 대범하며 쿨한 모습’이었다. 이 자아상에 못 미치는 현실의 내 모습이 정말 초라했다.

그래서 최대한 사람 많은 곳에서는 말을 아꼈고, 말을 하게 되더라도 얼굴이 화끈거린 채로 수줍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나’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커졌다. 이런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점점 증상이 심해지면서 무대에서 발표하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피했고, 오랜 꿈이었던 아나운서 라는 글자를 뇌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적면공포에 지배당하던 20대의 어느날, ‘집단인지행동치료’라고 써놓은 스티커를 학교 휴게실에서 봤다. 낯선 단어였지만 그 아래 써 있는 문구들은 낯설지 않았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는 분, 발표를 잘 못해서 괴로운 분 등의 이야기가 써 있었다. 내 얘기였다.      


호기심에 가 본 곳에서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됐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즉 적면공포였다.

적면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적면공포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걸 알고 난 뒤부터 서서히 두려움을 줄일 수 있었다.      


사실 얼굴이 빨개져도 아무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 얼굴 색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이다. 혹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순간이라도 그 사람에게 웃음을 줬으니 그것 또한 나쁜 건 아닌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없고 모멸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적면은 내 인생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적면 공포는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가둬놓은 공포였다.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었다. 허상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닫고 행동으로 확인한 후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얼굴이 빨개지는 상황을 피하지 않았고, 빨개지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게 뭐 어떤가, 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적면공포증, 무대공포증, 대인공포증은 사회공포증의 일환이다. 사회공포증은 광범위해서 남이 볼 때 글씨를 못쓰는 사람도 있고 목소리가 떨리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시선을 받거나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이 신체적 불안 증세로 표출된다. 그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두려운 감정에 자꾸 먹이를 주다보면 그 감정이 괴물처럼 변해 자신을 잡아먹는다.       

지금도 가끔 사람 많은 곳에서 말을 할 때 얼굴이 빨개진다. 심박동이 올라가고 얼굴의 모세혈관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시선이 집중되고 관심이 쏠리면 마음이 미칠 듯이 긴장된다. 타고난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얼굴색이 가끔 변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얼굴색 좀 바뀐다고 해서 ‘야 너 얼굴 빨개졌어’ 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좀 뻔뻔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발표는 나의 특기가 되었고, 오래 전 꿈꾸었던 아나운서처럼 회사에서 사회를 본다. 긴장되고 떨리지만 내가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가끔은 농담삼아 ‘나 관종이잖아’ 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그렇게 안 떠세요?”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안 떠는 게 아니에요~ 근데, 떨면 좀 어때요.”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 신기하게도 적면공포뿐만 아니라 적면 자체도 전보다 자취를 많이 감추었다. 

공포에 먹이를 주지 말자. 그건 한낱 허상인 두려움일 뿐이다.       


혹시 적면공포, 무대공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께 작은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썼습니다. 

집단인지행동치료도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들'을 적어보시고 적면공포, 무대공포의 상황이 왔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몇몇 경험해보시면 됩니다. 

놀라실 거에요~ 실제로는 진짜 두려워하는 것들의 반의 반절도 일어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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