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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02. 2021

가식적이어도 괜찮아요

민낯의 야성

퇴근 길에 있는 숲길을 지나왔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나무 냄새도 맡고 풀 냄새도 맡고 싶어 일부러 그 쪽으로 갔다. 자연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들이 서로 엉켜 있었고 나무엔 송충이가 기어다녔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면 이름모를 벌레가 징그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냥 정글 같았다. 무서웠다.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빠져나왔다. 들어서기 전에는 자연 길을 거닐며 이완되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더 긴장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자연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 것도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는 원래 무성한 정글 같다. 

지저분하고 무섭고 예측할 수 없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야성의 생태계가 있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연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이 아름답고 순수하고 평화롭게 느껴질 때는 인간이 손을 댔을 때다. 

잘 꾸며진 정원, 바다를 따라 조성한 둘레길, 넓게 펼쳐진 논밭, 동물들이 풀 뜯어먹는 목초지 같은 것들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인상을 준다. 모두 본래의 자연에서 약간의 가공이 들어간 것들이다. 


‘자연스러움’, ‘내추럴함’ 이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진짜 자연스럽다는 것은 대책 없고 거북스럽다. 

이 야성으로부터 우리가 긍정적인 느낌을 얻으려면, 자연을 약간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 때 쌩얼, 민낯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민낯이라기보다는 민낯인 것처럼 보이는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이 주목받았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도 ‘쌩얼 공개’ 라는 자막이 있지만 정말 태어난 그대로의 쌩얼은 아닌 경우가 많다. 눈썹 문신, 점 제거, 아이라인이나 입술 문신, 피부관리 등을 거쳐 나온 얼굴인데 추가 메이크업만 안했다는 소리다.      


낭독도 마찬가지다. 진짜 소리가 나오는 대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낭독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괴롭다. 

잠이 덜 깬 소리가 나오기도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억양의 잘못된 습관이 나오거나 발음이 뭉개지거나 속도가 빠를 수도 있다. 

정말 내 멋대로 타고난 민낯 그대로의 낭독을 한다면 볼품없어질 것이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아주 약간 다듬어져야 편안하고 듣기 좋은 낭독이 된다. 자연이든 낭독이든 약간의 가식이 필요한 것이다. 

보이스 수업을 할 때 가끔 참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낭독하는 경우를 종종 듣는데, 너무 야성미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마치 추리닝을 입고, 민낯을 한 후 머리를 올려묶은 것 같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랄까. 문제는 '너무' 민낯이었다는 것이다. 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럴 때 가식을 한 스푼 넣어달라고 말씀드린다. 듣는 사람이 있으니 조금만 정돈해달라고 말이다. 

가식이 한 스푼 얹어졌을 때, 원래 가지고 있는 센스나 느낌이 더해져 잘 정돈된 자연처럼 좋게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식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약간의 가식 한 스푼은 상대를 배려하는 예의고 정돈이다. 

볼 사람을 가정하고 정원을 꾸미고 둘레길을 내는 것이고, 들을 사람을 고려해 정돈된 속도로 낭독을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도 가식이 어느 정도 들어있기 때문에 원활할 수 있다. 영화 ‘카오스 워킹’에서는 ‘노이즈 바이러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들려 대혼란을 겪는다. 낭독도 의사소통의 일환이다.     

야성을 조금만 줄이고 가식을 한 스푼 보태보자. 적절한 가식은 사람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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