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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20. 2021

할머니의 목소리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첫 말은 이거였다. 

"엄마 힘드니까 이리 와." 할머니에겐 손녀보다 딸이 더 중요했다. 

그 다음 기억하는 말은 이거였다. "밤새 이불 차내쏴서 산타할아버지가 왔다가 그냥 갔다." 까랑까랑하고 약간은 느린,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냥 가버렸다고 해서 아쉬움에 기억이 또렷이 남았는데, 그래서인지 그 직후에 건네받았던 사탕 모양의 선물이 더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와 나는 같이 나이를 먹었다. 노인정은 '노인 냄새 나서 싫다' 던 할머니는 매일 샤워를 해도 특유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89세 할머니가 되었고, 셔츠 한 장도 그냥 입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했던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옷을 입고 벗기 힘들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항상 주변과 자신을 청결하게 정돈했는데, 그 날도 옷가지들을 높은 옷걸이에 걸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건 그냥 무릎 좀 멍들었네 정도가 아니었고 조그만 충격에도 부서지기 쉬운 뼈가 되어있던 할머니의 몸은 수술의 신세를 져야 했다.


수술 후 침대에 묶여 스스로 거동을 하기 어려웠던 할머니는 6남매의 간호 끝에 요양 병원으로 향했는데 그 날 거기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대로 갈란다."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이후 할머니는 환청과 환상에 시달렸고,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셨다. 

끝내 요양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할 수 없었던 6남매는 집으로 모셨고 그렇게 돌아가며 직접 1주일씩 돌봐드리고 있다. 


그러니까 요는,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점점 호전되고 있다고는 하나, 90여 평생의 끝에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할머니가 대체 어떤 마음이실지 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젊어서도 밤이면 무섭다고 밖에 나가지않으셨고, 무서운 꿈도 자주 꾸셨던 겁 많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께 가끔 전화를 드리는데,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힘들지?" 

아니, 요즘 딱히 힘든 일은 없다. 가끔 스트레스 받는 거야 누구나 겪는 인생의 디폴트 값 같은 거니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막히면서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까슬까슬한 목소리였다. 바람이 새는 목소리. 

어떤 단어인지 자세히 듣지 않으면 분별하기 힘든, 발음 발성 호흡 전부 다 좋지 않은 목소리였다. 

최근 들어본 보이스 중 가장 최악이었다. 


"아니요 할머니. 내가 왜 힘들어요. 괜찮은데?"

"왜 안힘들어. 힘들지."

힘든 걸로 치면 죽음을 앞에 두신 겁 많은 할머니가 제일 힘들지 않을까? 

스스로 먹지도 입지도 걷지도 못하는 90살을 두 달 앞 둔 할머니가 가장 많이 힘들지 않을까. 

나는 감히 그 마음을 그 육체를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런데 제대로 말하기도 힘든 그 목소리로 손녀딸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으시는 거였다. 

나는 그만 할머니의 나이와 나의 나이 같은 건 다 잊고, 밤새 이불을 차내쏘던 아홉살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투정부리고 싶었다. 더운 건 싫은데 자꾸 이불이 갑갑하다고. 세상엔 왜 산타클로스가 없냐고. 왜 사는 건 힘드냐고.

그건 나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활기찬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작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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