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이미 지난 일을 다시 되새길 수 있어 글 쓰는 것이 좋지만, 또 한편 그래야만 해서 힘이 든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과정이 또 하나의 회복과 위안으로 자리하길 바라며 조심스레 적어본다.
결국 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몹시 아프거나, 의식을 잃었거나, 대단히 응급이라서 하는 수술이 아닐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인 사람이 수술을 하게 되면 그 나름대로의 고충과 곤란함이 있다.
우선 수술복을 받아 손수 입어야 하고, 수술실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수술을 하고 나와서도 걸어 나와야 하며, 회복실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야 비로소. 내가 수술을 받았다는 걸 어렴풋이 실감한다. 그전까지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아서 스스로의 의연함에 놀랐는데, 회복실에서 눈을 뜨고는 나를 살피는 간호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엉엉 울어버렸다. 아마 그제야 실감이 났던 모양이다.
“아휴. 씩씩하게 수술 잘 받으시더니. 우리 다음에 예쁜 아기 또 만나요. 울지 마세요.“
회복실에서 수액을 다 맞은 후, 바구니에 들어있던 내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분만실 안에 있던 회복실을 나왔다. 나는 계류유산 진단 후 소파술을 하였는데, 정상적으로 아기를 분만하는 일반 산모들과 같은 분만실에 내내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도 들었고, 진통에 신음하는 소리도 들었다. 내가 있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서 다른 방 소리를 모두 모아 들을 수 있었다. 잔인하다고, 참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갈아 신는데, 커다란 칠판에 적힌 내 이름이 문득 보였다. 그 옆에는 나만 다른 표시가 그려 있었다. 나를 분만실에 혼자 둔 것도, 내 이름 옆에만 다른 표시를 한 것도. 못내 서운하고, 서럽고, 억울했다. 그것도 잠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며 황급히 신발에 내 발을 기운차게 욱여넣고. 간호사 선생님의 부축을 받으며 분만실을 나왔다. 분만실 바로 앞에는 보호자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있었다. 아기와 산모를 기다리는 보호자들 속에서 내 남편이 보였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목적과 다른 심정으로 앉아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톡톡 쏘고, 찌르르했다.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왔다. 짐짓 씩씩하게 간호사 선생님께 감사인사를 하고서, 남편에게도 방긋 웃어 보였다. 실제로 크게 아픈 곳도 없었고, 이미 회복실에서 한바탕 시원하게 운 후라서 더 이상 쏟을 눈물이 없기도 했다.
“고생 많았다.“
평소 남편이 나에게 해주는 가장 큰 위로의 말이다. 그 말을 하고는 눈이 시뻘게진 채 나를 쳐다보지 못하는 남편을 보면서 다시 웃어 보였다.
“오빠. 배고프다. 집에 가자.”
친정 집으로 갔다. 엄마는 미역국을 잔뜩 끓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기 낳을 때랑 똑같이 조리 잘해야 한대.”
유산이라는 말을 구태여 쓰지 않으려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다.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 신기하게 아픈 곳도 없다며 엄마와 남편을 안심시키고, 긴 낮잠을 잤다.
수술을 받고 온 사람이 맞나 싶게.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하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남편을 따라 우리 집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엄마는 주말까지만 잘 쉬었다가 가라고 부탁하셨다. 그러기로 한 그 이튿날.
양치를 하려고 양칫물을 받아 입에 넣었는데 이가 시리고 쑤셨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치통에 당황하던 찰나, 찬물에 닿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한 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몸이 이곳저곳 아프고, 욱신거렸다. 온몸을 어디에 부딪힌 사람처럼. 고장 난 것처럼.
엄마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회복할 때까지만 친정에 남으라고 하셨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남편을 따라 집에 가서 조용히 혼자 쉬고 싶었다.
그런데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집에 가기가 싫었다.
뽕뽕이가 생긴 것을 처음 안 날 사용한 테스트기. 뽕뽕이가 심장 소리를 들려주길 기다리며 읽었던 노랗고 두꺼운 책. 뽕뽕이의 초음파 사진. 내 이름이 적힌 산모 수첩.
그 모든 게 아직 그 집에 남아 있었다. 거기를 아직은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뽕뽕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또다시. 도망을 쳤다. 그 모든 걸 마주하고, 정리할 마음이 감히 생기지를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친정집으로 도망쳤고, 그것으로 모자라 어느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그 흔한 sns도 들여보지 않으며 마음으로도 도망을 쳤다.
남편을 혼자 보내고,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보고 싶어서, 이 상황이 속이 상해서 내 방 침대에 누워 울었다. 우선은 몸이 잘 회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모든 걸 다 참고 견디겠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다면 몸이 제대로 회복이나 될까 싶었다. 하지만 곁에서, 멀리서 나를 지켜봐 주고, 돌보고, 걱정하며 기다려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매일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들 덕에 괜찮았다. 그들 덕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고, 잘 먹고, 많이 자면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 않고, 혼자 실컷 울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갔다. 그리고 나는 점차 나아졌다.
그 와중에 의외로 핸드폰 게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숨은 그림 찾기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매일같이 마음을 다해 힘써 게임을 했다. 실컷 게임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고 생각했다. 왜일까. 이유가 뭘까. 내가 내린 결론은 게임을 하면 한 순간 어느 공간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거였다. 어떤 상념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벽히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해답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보다 더 좋은 것.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고,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 그날부터 나는 전자책 어플을 다시 구독하고, 열두 권의 책을 내리읽었다. 그리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그때그때의 내 마음을 읽어보고, 그 느낌을 글로 풀어쓰기 시작했다. 읽고 쓰는 일이 마음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그때부터 글을 다시 제대로 써야겠다 작심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을 얼추 회복하고, 나는 남편과 함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역시나 그대로 남아 있는 뽕뽕이의 흔적들.
늘 도망을 치고 나면 그대로 내달려 다른 길로 향했는데. 도망을 치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도망쳤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 했고, 매듭을 잘 지어 내는 일이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있었다.
다시 내 삶의 자리로 돌아와서, 내 생활을 다시 가꾸며. 뽕뽕이의 흔적을 하나씩 정리하고, 나의 아픔과 남편의 아픔을 다독이며. 나는 그렇게 조금 늦게 새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새해에 일어날 새로운 일들을 감사하며 마주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새로운 봄이,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