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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우리는, 그냥 쉬었습니다

꼭 관광지를 다녀야 해?

by 프리드리머


여행을 가면 늘 이렇게 생각했다. '여길 내가 언제 또 오겠어?'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기간에 많은 것을 보는 여행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서 진짜 휴식을 느낀다.

발리, 그중에서도 조용하고 한적한 사누르에서 우리는 그 쉼표 하나를 찍고 왔다.




사누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사누르는 관광객들보다는 장기 거주자들이 머무는 동네다. 유럽이나 호주의 은퇴한 부부들이 많고, 다른 지역보다 물가가 조금 저렴하다. 오래된 나무들이 줄지어 선 길을 걷다 보면, 시원한 그늘과 함께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이 내 취향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이 없이, 우리 둘만


우리가 지낸 호텔은 2층 복층 구조로, 다소 어두웠지만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5명이 지내기에 충분했다. 매일 아침이면 남편과 나는 노트북 가방을 챙겨 조용히 호텔을 나섰다. 조식을 먹고, 둘이서 천천히 스타벅스로 향하는 아침 산책길. 그 시간이 하루의 시작이 됐다. 결혼 후 10년이 넘도록 둘이 나란히 걸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이들 없이 둘이 다닌 시간이 드물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사누르의 따뜻한 공기 때문이었을까. 그 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 나누는 내가, 괜히 다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소박한 식탁, 큰 행복


일을 하다 보면 카톡이 온다. "엄마 어디야? 나 일어났어." 언제나 엄마부터 찾는 2호의 메시지다. 아이들과 엄마는 느긋하게 일어나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주로 넷플릭스를 보고, 엄마는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신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다시 메시지가 온다. "엄마, 언제 와? 우리 점심 뭐 먹어?"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먹고 싶은 메뉴를 묻고는 바로 점심 주문을 한다. 처음 사누르에 오던 날 점심을 먹었던 한식당이 우리 입맛에 꼭 맞아서 대부분 이곳에서 주문했다. 배달이 도착할 때쯤 시간을 맞춰 호텔 로비에 도착해 점심을 픽업해 방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아이들은 나를 끌어안고 격하게 반겨준다. 호텔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먹는 점심이 소박하지만 더없이 좋았다.




지금이 행복이다


점심식사 후, 아이들과 남편은 수영장으로 향한다. 나는 엄마와 함께 호텔 옆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선베드에 앉는다. 7월, 발리의 건기는 뜨거운 커피를 마셔도 덥지가 않다.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책을 읽는다. 그 사이로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노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은 충만해진다.

선베드에 앉아 아이들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광지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순간, 이 자리만으로 충분하다. '아, 이러려고 내가 비행기 타고 이곳까지 왔구나'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수영장에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은 매일 같지만, 그 안에 담긴 표정과 몸짓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그 미세한 변화들을 알아채는 일도 내겐 하나의 기쁨이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사진 속 배경은 늘 같은 수영장이지만, 내 마음속 장면은 매일 새롭고 반짝였다.


먹고 웃고 걷는다


오후 5~6시쯤 수영을 마치면, 방에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 외출에 나선다. 우리는 매번 구글 지도로 켜고, 별점과 리뷰를 꼼꼼히 살펴가며 맛집을 고른다. 초밥, 쌀국수, 피자와 파스타, 타코까지 골고루 시도했지만, 운 좋게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모두 한입을 베어 물고는 '맛있다' 또는 '너무 맛있다'를 외쳤고, 자연스럽게 웃음꽃이 피었다. 그 느낌을 안고 우리는 슬렁슬렁 밤 산책을 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예전에는 '여행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걸 봤느냐’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진짜 쉼이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됐다. 가이드북 대신 좋아하는 책을 챙기고, 일정 대신 하루의 리듬에 몸을 맡긴다. 느긋하고 심심한 하루들이 모여 내 마음을 충전시킨다.


평온하고 평화로웠던 사누르의 날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엄마와 나란히 앉은 선베드, 조용한 아침 산책길까지. 그 모든 순간이 지금도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문득,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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