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기루
뇌가 만드는 환상
우리 눈에는 시각 수용기가 없는 맹점(Blind Spot)이 존재한다. 즉 맹점에는 사물의 상이 맺히지 않기 때문에 맹점에 들어오면, 우리는 이미지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특정 지점이 블랙홀처럼 뻥 뚫려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맹점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다.
뇌는 놀랍게도 맹점 주변의 정보를 가지고, 추측하여 빈 장면들을 꼼꼼하게 채워 넣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뇌가 절묘하게 만들어낸 환상 속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맹점을 점령한 그들의 사랑
사랑하는 사이로 정의되는 그 순간, 서로가 인지하지 못했던 맹점이 공유되며,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순간을 살게 된다.
행복의 도파민에 취한 그들에게 보여지는, 그리고 믿어지게 만드는 사랑의 실재는 그들의 사랑을 더욱더 견고히 만든다.
“우리의 영혼은 완벽하게 서로 어우러지고 뒤섞여 두 사람이 결합한 이음새가 지워져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말하라고 내가 강요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이라는 건 말이에요, 외눈박이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어요. 왜 그렇게 추하게 생긴 여자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그 남자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내가 그를 사랑하게 하는 것, 그가 나를 사랑하게 하는 것, 그건 두 사람밖에 모르는 비밀이에요.
-몽테뉴의 어느 에세이에서 “
사랑의 신기루 속에서 사는 법
정의 내리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상황 속 감정이 만들어낸 맹점의 신기루가 그들을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환상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영혼의 이음새가 지워지며 함께 공유되는 맹점에 들어온 그의, 그녀의 수많은 단점들이 뇌에서는 절묘하게 장점으로 새롭게 갈아 끼워졌다. 그들은 뇌가 기억과 지각의 조각을 다시 짜 맞추는 고도의 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랑이 끝나갈 시점이 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흠집만이 맹점을 벗어나게 되었다. 아름다운 신기루로 채워나가던 세상에서 날 것 그대로의 흠집이 그 어떠한 저항력 없이 노출되어 버렸다.
어쩌면 인간은 일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이미 그 끝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점이 보이지 않는 그를 만난 것도 하늘의 운명 같았다. 하지만 여러 번의 경험으로 사랑의 맹점의 실재를 알아차려버린 그녀는 자꾸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맹점이 만들어낸 사랑의 환상 속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물어보았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미지의 그대에게.
“당신의 마음의 방에 한번 찾아가 봐도 될까요? “
“네. 언제요?”
“175일 뒤, 오후 7시 35분이 넘어가는 그쯤에요”
2023년 7월 3일 폭염 속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영감을 받은 책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서은국, 최인철, 김미정 저
-마음의 지혜
김경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