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보도블록에 플라타너스의 갈빛 추억들이 수북이 쌓이는 바야흐로 만추이옵니다. 이파리는 양분의 추억을 그리며 햇빛에 말라 떨어졌을 터인데, 인간에 의해 깔린 벽돌 한 장에 이파리는 흙으로 돌아갈 수 없네요. 꿉꿉한 아스팔트 저 아래 숨을 몰아서 쉬고 있을 흙더미에 바삭하게 잘 마른 가을 햇살 한 뼘 비출 수만 있다면...
떠나가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이치임에도, 나뭇잎은 인간에 의해 썩을 수 없고, 인간은 주변을 떠나고 싶지 않아 사사로운 것에 연연합니다. 모두가 보도블록 위에서 돌아갈 곳 없이 배회하며 살아가니 양분을 분해해 낼 시간이 없습니다. 수북한 미련 더미에도 햇살이 전구를 켜놓은 듯 반짝거려, 저는 멈추어 서신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공평한 햇살 한 뼘으로 스승님께서는 어떤 것을 가꾸고 계신지요. 배추와 무가 익어가는 동안, 저 또한 햇살 아래 사유하며 스승님 자취에 작은 반딧불로라도 자라날 수 있다면.
허나나지막하고 투박한 길을 바라실 스승님께서 완곡히 거절하실 것을 알기에, 저는 마음으로만 그 불을 켜고자 합니다.
채도가 없는 수수한 옷차림, 기교 없는 저속과 저음에서 배어 나오는 담백한 언어들. 스승님의 외양은 평생을 순하고도 자연스럽게 보내어 배인 것들이겠지요. 산자락이 사방에 병풍을 쳐두고, 햇살과 바람이 마루와 마당을 수시로 빌리고, 우산처럼 눈비를 막아주는 하늘 지붕 아래라면, 스승님은 어디나 계시네요. 사람들이 인사를 하면 언제나 붉은 토양 위, 초록의 순한 표정으로 친히 제자들을 맞이해 주십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인물보단 풍경 같단생각을 하였지요.
가장 소박한 밥상에 들꽃 같은 마음을 위대하게 담아내시어, 공기를 비우고 수행하듯 틈나는 대로 들꽃 같은 작물을 길러내시는 스승님.
도시의 보도블록과 달리,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생태에 제 마음에도 평안을 느낍니다.
언젠가 저희에게 그러셨지요. 어린 시절 해가 지도록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해서 구슬을 땄지만, 가득 모였던 구슬단지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인생을 살면서 어린아이의 구슬처럼 훗날 기억도 안 날 것이 얼마나 많겠느냐...
하지만 저는 부족하여 집착의 지붕 아래 이 순간도 마음에서 놓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훗날 지금을 뒤돌아보면 부질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고, 욕심내고, 후회합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모래를 만나지 못하고 말라가는 저 나뭇잎보다 저의 불편함이 더 크게 보입니다.
허나 이렇게 나무의 생각을 초석으로, 조금씩 배워갈 것을 저는 또다시 다짐합니다.
스승님. 간밤에 스승님께편지를 쓰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에 첫눈이 기척도 없이 내렸답니다. 노면은 젖었지만 그늘진 길가에 희끗하게 반짝이는 수줍은 눈 결정체. 환하고 풍요로운 곳보다 차갑고 후미진 곳을 찾아 밝히며 오래 반짝거리는 풍경이 스승님과 못내 닮았습니다.
어제까지도 만추 길목을 서성였는데 마침내 가을의 마침표를 찍어준 저 눈꽃도,
오로지 침묵으로 이파리를 다 떨구어내고 나목이 되어 겨울의 느낌표를 알려주는 저 나무도, 모든 것이 삶의 순리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스승님을 통해 아름다운 사계절을 인생의 사계절로 비추어 너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 스승님께서 제 계절의 일부가 되어주심을 어찌 제가 부정하겠습니까.
하루 사이 냉랭해진 기온에도 변치 않는 온화한 미소로 세상을 걸으실 스승님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국화차향이 그윽하게 퍼져 흐릅니다. 오늘 하루도 몸에 자연을 입히며 저의 경작을 무탈하게 마칠 수 있기를 작게 기도하며, 활자를 다듬어가렵니다. 각자의 경작, 각자의 병충해를 이겨내는 것이라지만, 제게 면역력을 주시어 감사하다는 마음하나를 온전히 남기며, 저는 오늘의 농사를 끝냅니다.
추신: 스승님께서는 인연을 바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계시지만, 제게 늘 평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의 안녕을 새벽의 첫눈처럼 고요히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