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이

by 지구 사는 까만별




산과 들판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그림 같은 내 고향. 마당 한 켠에 햇빛에 핀 살얼음이 반짝이고, 살얼음 위로 계절다운 겨울바람이 쉭쉭 소리를 내며 마당을 배회하고 있다. 엄마가 계신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유연하게 기어 다니는 푸른 바람을, 작게 반짝이는 마당의 살얼음 꽃이 지켜준다. 실로 그림 같은 이야기다.

바람이 기어 다닐 때 즈음 엄마의 생신은 찾아온다. 생신날이 되면 그전날 자식들과 손자들의 신발들로 신발장이 가득 찬다. 지루함에 스스로 몸이나 뒤집던 현관 앞 신발장이 간만에 키득거리며 마구 뒤집어지고, 우리 아버지는 신발들이 떠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신다. 소란스럽고도 평화로운 하루. 실로 그림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몇 년전 부터 퍼지는 질병으로 인해, 평범하지만 특별한 생신이 그림처럼 더 이상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온 가족 대신 한가족으로 따로 찾아뵙는 걸로 위안 삼아야 하는 말에 엄마는 괜찮다며 말씀하신다.

"우야든동 니들만 건강하면 된다. 옛날이 몸은 더 고될진 몰라도, 요즘보다는 사람 살기가 훨씬 좋았지."


문득 엄마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바이러스 때문에 엄마를 자주 못 만나는 거지만, 엄마는 너무 넓은 강 건너에 있을 엄마의 엄마를 몇십 년째 바라만 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승에도 저승에도 있는 우리 엄마는 강의 나루터.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들이 쉭쉭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이 세상에서, 굳게 강을 지키는 나루터는 내 마음에 서리꽃이 되어 햇살 아래 반짝인다.


시댁 식구 여럿 모시고 사는 게 힘들었겠는데도, 우리랑 아버지랑 다 같이 한 집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겠다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겨울에 태어난 서리꽃은 얼음으로 만들어졌음에도 한없이 따뜻하고, 얼음으로 만들어졌기에 한없이 단단하게 내 마음에 피어, 멀리 떨어진 내 세상을 지킨다. 엄마의 엄마가 언젠가 '아가야, 보고 싶었다'는 말을 우리엄마에게 해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