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수리 마수리 Aug 24. 2021

여보세요, 이순신입니다

왜 전화하셨어요?

따르릉, 따르릉.

“무슨 전화가 이리 자주 와?”

친구가 물어본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친구 앞에서 표시 내지 않고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야?”

전화를 끊고 나니 친구가 물어본다.

“이순신 장군.”

“뭐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이긴대.”

“친구끼리 게임하는 데 죽음을 각오해야 돼?”

나는 대답 대신 전화기를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이 전화 앱은 깐지 일주일 되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상당히 인기가 좋다.

앱은 내 일정표와 연동되어 있어서 중요한 순간에 전화가 온다.

나는 전화로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과 대화도 하고 질문도 한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내가 먼저 전화를 걸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과 전화하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지지 않는다.”

이 말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꼭 “지면 죽어야 한다”는 말로 들려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것만 빼면 나머지는 썩 근사한 편이다. 무엇보다 휴대폰 화면에 있는 아이콘이 마음에 든다.

긴 칼.

이순신 장군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칼이다. 아이콘을 볼 때마다 이순신 장군의 시조가 저절로 떠오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나는 초등학생 때에는 주로 개그맨이나 축구선수와 전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어린아이답다.

중학생 때에는 야구선수와 자주 전화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앱을 바꾸었다.

나처럼 꿈이 큰 고등학생이라면 당연히 이순신 장군하고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반에는 을지문덕 장군과 하루에 스무 번 이상 전화하는 친구도 있고, 광개토대왕에게 짝사랑 고민을 털어놓는 녀석도 있다. 역시 남학생들은 장군을 좋아한다.

여학생들에게는 남자 아이돌이 인기가 높다. 특히 여럿이 나와서 라이브를 하며 칼군무를 추는 것을 보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답다나 어쩐다나. 날씬한 여자 탤런트는 의외로 인기가 없다. 괜히 다이어트가 생각나고 그냥 기분이 나빠져서 싫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이상한 친구도 있다. 항상 전교 1등을 하는 녀석인데 아인슈타인하고만 전화한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에도 떨어졌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었는데? 이 녀석은 간혹 소크라테스와도 전화한다고 말하지만 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왜 아인슈타인하고 전화해?”

내가 물어보니 1등 하는 친구는 “엄마가 하라고 해서”라고 답했다.

그 얘기를 엄마한테 했다가 졸지에 나도 아인슈타인 옵션을 다운로드하게 됐다. 다행히 가격 할인을 하는 데다 그동안 모아둔 포인트가 있어서 공짜로 받았지만 엄마에게는 구입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더 묻지 않고 용돈을 올려주었다.


어느 날, 내가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는데 아인슈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분위기 망칠까봐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여자 친구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할 수 없이 아인슈타인 아이콘을 보여주며 전화를 받았다. 의심받기보다는 지루한 편이 낫다.

“왜 전화하셨어요?”

“아이작 뉴턴은 f=ma라고 말했어. 무슨 말이냐면 여자(female)는 돈(money)과 나이(age)의 곱이라는 말이야. 여자는 돈이 많고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 말인데 해석하자면 밥 잘 사주는 누나가 좋다는 의미지.”

“그런가요? 저는 운동방정식인줄 알았는데요?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라는 의미로.”

“그게 바로 뉴턴의 노림수였어. 여자에 대한 공식이라고 하면 남자들만 알고 여자에게는 비밀로 할까 봐 의미를 숨긴 거지. 하지만 이 공식이야말로 연애를 한 번도 못해 본 멍청이다운 발상이야.”

뉴턴을 멍청이라고 불러서 내심 놀랐지만 아인슈타인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아인슈타인은 반드시 내 호응을 이끌어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풍부한 내 연애 경험으로 보면 전혀 달라.”

아인슈타인에게 풍부한 연애 경험이 있었던가? 근데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내 연애가 중요하지 아인슈타인의 연애가 뭐 대수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인슈타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매력은 상대적이야. E=mc^2. 매력(Elegance)은 돈(money)과 접촉(contact) 제곱의 곱이라는 말이지. 잘 들어, 아주 중요한 이론이니까. 돈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자주 접촉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야.”

“저기, 그건 상대성 이론 아닌가요? 에너지는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이라는.”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공식이다. 아인슈타인은 놀란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너, 고등학생인데 벌써 매력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단 말이야?”

옆에서 여자 친구가 시계를 쳐다본다. 그만 끊으라는 신호다. 아인슈타인 때문에 데이트를 망칠 수는 없다.

“저 지금 데이트 중이거든요. 그 이론을 검증해볼 기회네요.”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럭저럭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니 아무도 없다. 라면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냉장고를 열다 보니 문득 나 자신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정한 대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정한 대로 수업하고. 수업이 끝나면 엄마가 정한 대로 학원에 가고......

‘내 인생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잖아.’

나는 갑자기 나 자신과 대화하고 싶어졌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나’ 옵션을 신청했다. 절차는 간단했다. 내가 작성한 메모나 노트를 사진 찍어 보내면 된다. 시험 답안지를 보내라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도 나의 지적 수준과 맞추려는 거겠지. 자료를 보내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디저트로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 나는 나야.”

전화기 건너편에서 내가 말했다. 나는 나와 첫인사를 나누었다.

“안녕, 나도 나야.”


그 후 나는 ‘나’ 옵션을 열 개도 넘게 구입했다.

미래의 나, 이상적인 나, 부모님이 원하시는 나, 국가가 원하는 나,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 여자 친구가 생각하는 나, 원래의 나, 나도 모르는 나, 놀고 싶어 하는 나, 공부를 싫어하는 나, 내가 원하는 나, 내가 좋아하는 나, 내가 싫어하는 나......나하고 전화하는 옵션은 아무리 많아도 끝이 없다.

나하고 전화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를 모르겠다.

오늘도 신상품을 하나 구입했다. 상품명을 본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기 때문이다.

신상품 특가판매 ‘나는 왜 나하고 전화하는가’

(끝)

이전 07화 열 받게하는 재주도 재주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