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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가루 May 19. 2022

한강의 「채식주의자」

해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총 세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입니다.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을 받은 것을 보면 작품성은 있나 봅니다. 작년 정말 오랜만에 간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라 하여 구매를 했고 집에 오는 버스에서 전부 읽어버렸는데, 그 정도로 가독성은 좋습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는 재미있고, 몽고반점은 그저 그렇고,  나무불꽃은 신기합니다(재미없다는 뜻). 특히 나무불꽃은 이전에 희랍어시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시 쓰듯 소설 쓰기"가 다른  작품보다 두드러졌고, 저의 취향에 맞지 않았습니다. 아래에 각 단편들에 대한 저의 해석을 적습니다. 참고로 몽고반점은 그것을 주제로 한 논문을 몇 편 찾아보았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채식주의자 -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주인공인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꿉니다. 꿈에서 그녀는 폭력적인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얼굴과 팔에 상처를 내는 뾰죽한  잎들,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매달려 있는 헛간,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은 얼굴. 꿈에 나온 강렬한  장면들은 그녀가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는 계기가 됩니다. 그녀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는 폭력적인 장면이 대표적으로 두 가지 등장하는데, 하나는 그녀의 남편에 의해서, 다른 하나는 소설의 절정  부분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보여줍니다. 둘 다 상당히 강렬하고 거칠고,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 그녀는  평소에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토를 하고 며칠 동안 몸이 아플 정도라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러한 타자의 폭력에 대해 영혜는 저항합니다. 물리적으로 저항한다기보다, 그녀는 육식을 하지 않고, 자신의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 따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저항합니다. 그녀는 심지어 고통스러운 꿈을 거부하기 위해 잠을 자는 것 또한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상적인 점은 그녀가 절대로 자신을 폭력의 대상으로만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자신 역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전에 「해변의 카프카」에  대해 다루면서 나왔던 이야기인데, 인간은 꿈을 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며 인간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꿈은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혜는 작품 내에서 절대 자기를 피해자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꿈에  누군가의 목을 자를 때,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할 때, ....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 작가는 폭력이 본능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혜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고,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젖가슴은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누군가를 찌를 듯이 점점 야위어져 갑니다 (이 부분은 아래에 나무불꽃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녀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아이러니한 점은 그녀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이 그녀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아버지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 그녀를 걱정하여 고기를 먹을 것을 강요합니다.  단어 간의 거리감이 있다면 양 끝에 위치하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랑"과 "폭력"은 이 작품에 따르면 이렇게나 가깝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집어 든 과도는 결국 그녀 자신을 향합니다. 인간은 폭력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취약합니다. 대상이 될 수도, 주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몽고반점 - 원초적으로 돌아가는 것

   전편 채식주의자에서 스스로를 자해한 영혜를 잽싸게 등에 업고 병원으로 데려간 그녀의 형부가 몽고반점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비디오 아티스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혐오가 있습니다. 중년의 불룩한 배,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 등 자신의 외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있으나, 그의 자기혐오는 원하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현실로부터 기인합니다. 혹은 이상향과 자신이 너무 멀기 때문에, 이상향의 속성을 자신은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싫어합니다.


   그는 그럼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요? 우선 그의 아내부터 봅시다. 아내의 이름은 인혜이고, 영혜의 언니입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쌍꺼풀 수술을 했고, 지금은 화장품 장사를 합니다. 꽃집, 과일가게, 정육점도 아니고 화장품 가게입니다. 그녀는 소설 내내 굉장히 참을성 있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녀의 참을성과 희생은 나무불꽃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녀는 문명, 현대, 도시를 닮은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아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그리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아내보다는 그녀의 동생, 자신의  처제, 영혜를 원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강렬한 예술적 이미지가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영혜는 몽고반점의 소유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나체를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녀의 원룸을 방문한 주인공에게 우연히 자신의 나체를 보인 그녀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끌어다 자신의 몸을 가리는데, "부끄럽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라, 으레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순수한 존재, 날 것 그대로의 존재, 원초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술가로서 순수를 동경합니다.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 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들"을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모두 거짓이며 그것들에 염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그가 잊어왔던  순수성에 대한 열망이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의식의 표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몹시 어려워 보입니다. 일단 둘의 관계가 형부와 처제이기 때문에 모두로부터 도덕적 비난을 받을 것이 자명합니다. 책에서는 그가 영혜를 생각하며 자위하는 장면을 통해 "샤워기 아래로 뛰어들어 정액을 씻어내며 그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신음을 냈다. 물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라며 차가운 현실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욕구"는 신체적인 변화(발기) 때문에 성욕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성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임을 짚고 넘어갑시다. 그의 발기는 일반적인 성욕과 다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녀의 알몸을 보고 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늘 옷을 벗고 다닌다는 사실을 듣고 발기합니다. 그녀의 순수함에 반한 것이지, 그녀의 육체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몸에 그림을 그리며 그는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을 느낍니다.


  어쨌든, 그는 동경하는 영혜와 하나가 되기를, 그녀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을 자신의 "혀로 옮겨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영혜를 범한 동서에 대한 질투와 증오를 보여주기도 하고, 순수하지 못한 상태(몸에 꽃을 그리지 않은)로 영혜와  하나가 되려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만,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리고 그녀와 성관계를 가집니다. 그토록 추구해온 자신의 이상향을 달성한 예술가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그런데 그와 영혜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어떤가요? 주인공 대신 처음 영혜와 비디오를 찍던 J는 비참함을 느끼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의 몸에 꽃을 그려주는 옛 연인 P는 그에게 안돼 보이고 불쌍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어떻습니까? 결국 둘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립니다. 주인공에 몰입해서 읽다가 아내 덕에 저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병원으로 보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 이성적이기 때문에, 원초적인 것, 날것을  동경하는 마음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의 성욕을 억제하고 숨기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드러내서도 안됩니다. 


나무불꽃 - 상호 이해가 가능할까요

   순수한, 원초적 존재인 영혜는 정신 병동에 갇히게 되고 좀 더 원시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원시적인 것 하면 우리는 보통 동물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식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독특합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나무가 되려 합니다. 영혜가 나무를 물구나무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말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마치 나무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래도 영혜를 정신병원에 보내긴 했으나, 언니인 인혜는 세 편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참을성 있고 가히 희생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어쨌든 이야기 내내 영혜를 설득하려 하고, 보살펴주고 이해하려 합니다. 인혜는 원초적인 본능과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많이 지쳤습니다. 그녀에게 영혜는, 그녀에게 남편은 점점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부정적인 존재가 되어갈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도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 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반대로 영혜도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라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자매 관계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더 이상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마지막 시도가 이야기 속에서는 인혜가 영혜에게 밥을 먹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은 오직 30분뿐입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는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 독자에게 끊임없이 알려줍니다.  꾸준히 "시간은 흐른다"라고,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라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알려주며 마지막엔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라며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 납니다(이 부분은 실제 소설을 보면 형식 자체가 시처럼 되어 있으며, 작가의 특징이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혜가 보기에 동생은 사실 죽어가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인혜는 자신이 보았던 나무들의 푸른 불길을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로서 인식합니다. 계속 살아가라는 메시지조차 인혜에게는 너무도 가혹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야위었던 영혜의 몸은, 몽고반점에서 다시 보기 좋게 차올랐으나, 나무불꽃에서는 다시 뾰족하게 야위게 됩니다.  마치 야윈 그녀의 뾰족한 젖가슴이 그녀의 언니를 향하는 것 같습니다(그토록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던 영혜의 바람을 생각하면 슬프고 아이러니합니다). 이야기는 이동하는 구급차 안에서 끝이 나지만, 큰 병원으로 이송된 영혜는 분명 계속 먹는 것을  거부하여 죽고 말거나, 먹는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원시성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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