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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무 May 28. 2024

사랑은 매운맛, 버건디 생채 비빔밥



때는 바야흐로 불닭볶음면이 처음 출시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라면이 인기를 얻기 전이라  어떤 홍보도 리뷰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단순히 ‘자가 들어가는 이름에 끌려 그것을 처음 먹게 되었다. 혀가 얼얼하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매움에 매료되어 직장일이 고된 날이면 습관처럼 불닭볶음면과 맥주  캔을 사들고 퇴근을 하곤 했다.


매운 라면에 불타오르는  안을 시원한 맥주  모금을 들이키며 식혀주며 ~” “후아!” 호들갑을 떨다 보면 답답했던 하루의 스트레스가 불에 타고 재가 되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불맥 조합으로 야식을 즐기고 있던 나의  뒤에서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뭘 그렇게 맛있게 먹어? 나도 한 입만 먹어보자.”


“이거 엄마한테 매울 텐데.”


“뭐 얼마나 맵다고.”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라면을 먹은 엄마의 입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나쁜 년.”


“?”


“케헥, 콜록콜록. 이런 걸 왜 먹어! 속 버리게!”


“맛있는데….”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불닭볶음면을 통해 이를 잘 알게 된 엄마는 딸을 위해 청양고추를 아낌없이 사용하며 요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더 맵게. 아주 맵게.

그러면 딸아이가 아주 맛있게 밥을 먹겠지?라는 엄마의 마음이 엿보여서, 엄마의 매콤한 요리들을 먹으며 나는 행복함을 느꼈다.


그 당시 엄마의 사랑에선 뜨겁고 매운맛이 났다.


오직 딸의 식성을 고려해 아주 칼칼하게 끓인 된장국을 맛본 아빠는 벌컥 화를 내기도 하셨다.


“누가 된장찌개를 이렇게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지!”


“우리 딸이가 매운 거 좋아하잖아. 내 딸 맛있게 먹으라고 맵게 했지.”


엄마의 당당한 발언에 아빠는 더 뭐라 하지 못하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식사를 하셨다.

그 된장국은 내 입맛엔 딱 좋게 맛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줄줄 울면서 잡채를 무치고 계셨는데, 엄마가 내민 잡채  입을 먹고 모든  이해할  있었다. 나도 눈물이  만큼 매운 잡채였다. 세상에. 잡채가 이렇게도 매울  있다니.


엄마는 점점 더 매운 요리를 만드는데 심취하셨다.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는지 어디선가 베트남 땡초고추를 구해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요리에 아낌없이 사용하셨다.


어느 날 집에 가 보니 식탁 위에 락앤락 반찬통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그 반찬통 안에는 갓 담은 것이 분명한 무생채가 담겨 있었다. 엄마의 무생채는 아주 얇게 채 썰어서 만드는 게 특징인데, 양념이 잘 배인 그 얄쌍한 무채는 밥을 비벼 먹기에 최적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무생채는 평소와 다른 점이 보였다.


“엄마. 이거 색이 왜 이래?”


내가 익히 아는 무생채의 색상과는 좀 다른 …. 그 당시 유행하던 버건디 컬러가 연상되는 검붉은 무생채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엄마는  넘치는 창의성을 요리에 종종 사용하곤 하셨고, 몇 번의 당황스러운 시식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 그거?”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엄마가 뒤 돌아보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답했다.


“베트남 고추를 갈아서 고춧가루로 만들었는데. 그걸로 무쳐서 그래.”


“……?!”


무에서 배어 나온 물에 희석된 고춧가루로 연한 주황빛을 띠는 일반적인 무생채가 아닌, 짙은 갈색을 띤 빨간색. 진짜 베트남 땡초 고추의 색이네.


정체불명의 버건디색 무생채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고 신뢰가 생겼다. 그렇다면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하얀 쌀 밥 위에 젓가락 가득 무생채를 집어 얹고, 반숙으로 익힌 계란 프라이와 참기름을 더해 샥샥 비볐다.

김가루도 빼놓을 수는 없지. 조미김을 부스럭부스럭 비벼 밥 위에 뿌려주니 금세 완성이다.


숟가락 가득 얹어진 무생채 비빔밥이 입 안에 들어오자 혀가 춤추기 시작한다.

후하 후하- 매운맛에 달궈진 혀를 식히면서도 숟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춧가루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맛이 달라지다니. 인생 무생채를 만난 날이었다.


베트남 고추가 거의 다 떨어졌으니, 인터넷으로 주문해 달라는 엄마의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었다.




엄마의 사랑만 매운맛이었던 건 아니다.


나의  남자친구들은 매운걸  먹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사랑한 탓에 데이트  매운 음식을 자처해서 먹으러 가자고 했던 그들이 생각난다. 매운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는 내게, 네가 매운  좋아하니까 그거 먹으러 가자고  손을 이끌었던 다정한 남자들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운맛에 혀가 아파 어쩔 줄 몰라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내가 맛있게 먹는지 확인하고 웃으며 그 매운맛을 견뎌냈던 그들의 용감한 애정이 참 고마웠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의 사랑은 내게 매운맛으로 추억되고 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매운걸 (나름대로는) 절제하고 있기 때문에 버건디빛 무생채를 다시 만날 일은 요원한 상태이다. 엄마의 주방에서도 베트남 고추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하지만 매콤하고 얼얼한 사랑의 맛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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