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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무 Jun 04. 2024

불량한 어른이를 위한, 심야의 즉석 비빔밥


학생일 적에는 딱히 불량한 학생이 아니었는데, 졸업하고 십수 년이 지난 요즈음의 나는 제법 불량한 어른이 되었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잘 사는 사람들과, 갓생을 사는 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나는 불량한 생활 습관을 한가득 가지고 살고 있다. 불규칙하고 비효율적인 하루하루를. 그런 나의 일상을 채우는 몹쓸 습관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핸드폰을 보다가 잠에 드는 것이다.


불 꺼진 침대 위에서 바스락 거리는 이불을 덮고 모로 누워,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소중히 붙잡고 웹서핑과 유튜브를 시청하거나, 좋아하는 웹소설의 최신화들을 읽다가 눈이 가물가물하며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드는 것이다.


이 수면 방식은 다음날 기상에 굉장한 악영향을 미친다. 잠을 잤는데도 피곤하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하루빨리 고쳐야 할 습관이다. 그렇지만 나쁜 습관은 좀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그날도 밤늦게 핸드폰을 하고 있던 차였다. 스르륵- 잠이 올락 말락. 의식이 점점 까만 어둠 속으로 서서히 다이빙하던 그때였다.


위이잉~.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날갯짓 소리에 순식간에 의식이 또렷해진다. 형체가 없는 찬 물을 뒤집어쓰고 정신이 깨버린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나는 미간에 힘을 뽝 주고 재빨리 침대 밖으로 나와 전등을 켰다. 항시 풀충전해 두는 일렉트로닉 버그 라켓. 나의 든든한 무기인 전기 파리채를 들고 매서운 눈으로 방 안을 수색한다. 몸치에 반사신경 동체시력 모두 처참한 수준인 비루한 몸이 이 순간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극도로 긴장하며 예민해진다.  


마음만은 레옹 혹은 존 윅인 순간.


휙.


팔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파짓. 파지짓.


전기 튀는 소리에 암살 임무를 마친 방구석 존 윅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다. 소중한 잠을 방해한 자그만 빌런을 냉혹하게 처리했으니 이제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 수 있겠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본다.


너는 지금 졸린다. 눈이 잠긴다. 곧 잠에 든다. 잠에 빠진다아. 주문을 외듯 되뇌는 중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이씨….”


저녁을 너무 일찍 먹었나.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 해 보았지만 진동하며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결국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을 어슬렁거리는 굶주린 하이에나 한 마리의 눈에 사냥감이 포착되었다. 주방 찬장에 반듯하게 놓인 노란색 컵라면 큰 컵 모양의 용기.


크고 굵은 글씨로 [전주식 돌솥 비빔밥]이라고 쓰여 있는 즉석 비빔밥이었다.


햇반과 나물. 고추장, 일회용 스푼으로 이루어진 인스턴트 비빔밥에 어째서 ‘전주’와 ‘돌솥’이라는 단어가?라는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냥 비빔밥. 가정식 비빔밥. 나물 비빔밥. 즉석 비빔밥. 이런 제품명보다 그럴듯해서였겠지.


엄마가 밥 하기 번거로운 때를 대비해 박스로 주문해 두셨던 즉석 비빔밥을 몇 개 챙겨주셔서 냉큼 받아왔던 것이다.

뜨끈하게 데운 즉석밥에 고추장 소스와 나물 건더기 봉지를 뜯어 넣고 섞어주면 조리는 끝이다. 아! 참기름도 빼놓으면 안 된다.


빠르고 간단히 완성된 비빔밥을 입에 넣으니 조금은 심심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김 한봉을 가져와서 비빔밥을 싸 먹자 그제야 아쉬움이 채워진다.


썩 맛있다고 할 수 없는 맛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맛없지도 않은 보통의 맛.


그래서 야심한 이 시간에 어울리는 비빔밥이다. 너무 맛있는 야식은 지나친 과식을 부르거나, 잠을 홀딱 깨워버리기 마련이니 주의해야 한다. 고요한 새벽에 먹기 좋은 잔잔한 맛이 텅 빈 배를 채운다.


“딱 좋네.”


배가 부르니 나른하게 졸음이 몰려온다. 바로 누워서 자면 좋겠는데. 밥 먹고 바로 누워서 자면 소가 된다던 속담이 떠올라 마음이 신경 쓰였다. 이대로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과 적어도 삼십 분 후에 눕자는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소가 될 일은 없겠지만, 역류성 식도염은 무서우니까. 나는 중도를 선택하기로 한다.


방 한편에 접혀 있던 무중력 의자를 펴고 앉는다. 의자를 뒤로 젖히니, 반쯤은 앉고 반쯤은 누운듯한 자세가 되었다. 모기와 배고픔을 해결하니 한결 편해져서 그런지 잠이 솔솔 몰려왔다.


내일은 꼭 바른생활습관을 실천하리라. 성공을 기약할 수 없는 다짐을 하며, 늦은 시간에 야식까지 두둑하게 먹어버린 불량한 어른이의 하룻밤은 또 이렇게 지나간다.  


‘여기서 잠들면 안되는데에.’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인스턴트 비빔밥을 좀 더 쟁여놔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일찍 잠들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배까지 고파서 서글퍼진 어른이를 도와줄 새로운 아이템을 발견한 것이 뿌듯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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