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불현듯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언제라도 훌쩍 떠나면 좋으련만. 시간과 체력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지 못하기 일쑤다.
여행은 가고 싶지만, 멀리 가기엔 부담스러울 때. 나는 옷장 한편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한복을 꺼내든다.
몇 년 전, 한복집에서 주문 제작한 허리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단정히 묶은 뒤, 흰 운동화를 신고서 내 고향 전주 관광의 중심인 한옥마을로 향한다.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하마비(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힌 비석. 궁궐, 종묘, 고택 등의 앞에 세워져 있다)를 본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뇌까린다.
‘나는 관광객이다. 전주로 여행을 왔다.’
한두 다리 건너면 얼추 다 아는 사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좁은 지역사회라지만, 평일 점심 무렵의 한옥마을에서 날 알아볼 사람은 없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관광객 흉내를 내며 짧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고풍스러운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인 전동성당을 지나니 이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조선시대의 전각인 경기전이 나왔다.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가진 동서양의 고전 건축물이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를 잘 맞추면 경기전 수문장 교대의식도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보지 못했다.
성악가 조수미 님이 불렀던 명성황후 드라마 ost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던 경기전 돌담길 옆을 지나는 발걸음에 여행자의 설렘이 경쾌하게 실렸다. 학창 시절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던 암살자역의 스턴트 배우분들이 담을 뛰어넘는 와이어 액션을 찍는 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했었다. 사소한 일에도 근심 없는 얼굴로 까르르 웃었던 시절의 추억에 잠시 젖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눈앞에 먹자골목이 나타났다. 널리 알려진 한옥마을 먹거리인 문꼬치와 만두집 앞에는 진짜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문꼬치랑 만두라.’
그것도 좋은 선택이지마는, 나는 매콤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파는 곳에 들렀다. 함께 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지금은 서울에 사는 동생이 매번 전주에 올 때마다 들리는 로컬 빵맛집이다. 예전과는 맛이 달라져 아쉬움이 있지만 여전히 한 번씩 생각나는 맛이다.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는 진짜 관광객들 사이를 지나치며 바삭한 빵을 와작와쟉 씹어 먹으니 입가에 빵가루가 잔뜩 묻었다. 그 부스러기를 털어내는데 미소가 실실 새어 나왔다.
‘음. 누가 봐도 관광객이네. 관광객이야.’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혼자 뿌듯해하며 한옥마을 외곽에 자리한 향교로 향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지 않아, 한옥마을 중심부에 비해 비교적 한적한 곳이다. 이곳을 종종 방문해 오래된 한옥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 고요한 평화로움을 좋아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처마 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이 음악소리가 되어 귓가를 적신다. 그 분위기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전통 혼례가 열리기도 하고, 수령 400년이 훌쩍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단풍 구경을 오기도 좋은 전주 향교.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촬영했던 장소이기도 해서 좋아하는 배우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김갑수 님께 사인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싸인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잠시 한적함을 즐기고 향교를 나와 교동 미술관, 최명희 문학관등을 돌아다니고 나니 아까 먹은 빵이 다 소화되었다고, 뱃속이 요란하게 신호를 보낸다.
지친 관광객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발걸음을 바삐 재촉한다.
관광객 흉내에 방점을 찍어줄 곳, 전주비빔밥 전문점을 향해 전진했다.
전주 사람은 비빔밥을 돈 주고 사 먹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비빔밥을 돈 주고 사 먹는 전주사람이다.
유명한 비빔밥집 몇 군데를 들러보았다가 정착한 단골 비빔밥 전문점에 도착하니, 점심 피크타임이 지나 빈자리가 있었다. 기본 메뉴인 가마솥 비빔밥을 주문했다. 주문과 동시에 밥이 지어지기 때문에 비빔밥이 나오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린다. 상 한가득 차려진 밑반찬들을 먼저 맛보며 느긋하게 기다리다 보면 색색의 화사한 비빔밥 재료들이 정갈하게 담긴 유기그릇과 1인용 가마솥이 나온다.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갓 지어진 밥을 떠서 유기그릇으로 옮겨 담는다. 숟가락으로 밥을 비비면 비빔밥이 완성되지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가마솥으로 빠른 시간에 지은 밥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평소에 밥 비비듯 설렁설렁 비볐다가는 뻣뻣하고 억센(?) 밥 맛을 보게 된다. 숟가락으로 밥알의 기를 죽이듯 꾹꾹 스냅을 줘가며 눌려 비벼줄 때 비로소 쫀득쫀득 찰진 식감으로 변한 밥이 비빔재료와 고추장과 어우러져 이 집만의 비빔밥 맛을 완성한다. 집에서 해 먹어도 되는 비빔밥을 굳이 외식으로 사 먹게 되는 매력을 가진 맛이다.
잘 비벼진 한 그릇을 보니 절로 군침이 넘어간다. 그렇지만 신나게 밥을 먹기 전에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밥을 떠낸 가마솥 바닥에 눌어붙어있는 딱딱한 누룽지에 물을 부어주는 것이다. 비빔밥을 먹는 동안 잘 풀어져 부드러운 누룽지가 되도록. 여기까지 했으면 이제 즐겁게 비빔밥을 먹으면 된다. 여러 가지 재료들과 쫀득한 밥알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머리로는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입은 꿀덕꿀떡 삼키느라 바쁘다. 밑반찬과 함께 나온 칼칼한 청국장과 함께 먹다 보면 금세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게 된다.
빈 그릇은 옆으로 치워두고, 아까 물을 부어두었던 가마솥의 뚜껑을 여니 잘 풀어진 누룽지가 보인다. 매콤한 비빔밥으로 달아오른 입 안에 슴슴한 누룽지를 넣어주니 평화가 찾아온다. 누룽지에 짭짤한 밑반찬을 곁들이니 배가 부른데도 계속해서 들어간다.
“크으. 이 맛이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만족스럽게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다. 허리에 꽉 동여맨 한복 치마 허리끈을 살짝 느슨하게 고쳐 매고 다시 길을 떠난다. 식후에는 커피를 마셔야지! 보무도 당당하게 카페를 찾아 나서는 가짜 관광객의 얼굴에 빙그레한 웃음이 걸린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자유로운 여행자의 기분을 좀 더 만끽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