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무 May 30. 2024

아프면 무를 무라, 무나물 비빔밥


목은 간질간질, 머리는 지근거리며 무거운 돌덩이를 인 듯이 가누기 어렵고, 온몸은 어디서 구르고 오기라도 한 듯 욱신거린다.


감기네, 감기야. 


아주 된통 걸린 것이 분명했다. 병원에라도 가고 싶지만 아뿔싸. 이놈의 감기는 꼭 주말에 찾아오고 난리다. 가까스로 기운을 그러모아 집 앞 편의점으로 감기약 사냥을 다녀왔다. 약사의 복약지도가 없어도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빈 속에 감기약을 털어 넣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맨밥 몇 숟가락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약을 털어 넣었다. 까끌한 입 안에서 밥알은 마치 진흙 섞인 모래처럼 서걱대서 삼키기가 쉽지 않았다.


약기운이 돌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널브러져 한숨 자고 일어나니 친구K양에게 전화가 왔다. 방에서 혼자 끙끙대던 서러움이 터졌는지 내 입에서 하소연하듯 나 감기야 아포- 하고 칭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찡찡대는 말투는 가끔 가족들에게나 쓰던 건데 친구에게까지 사용하게 될 줄이야.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지만, 이를 들은 K양은 어디서 귀여운 척 이냐는 타박이 아닌 감기에 좋은 자신만의 비법을 알려주었다.


아, 따뜻한 우정이여!


친구 K 씨의 

<코로나와 감기에 걸려 고생할 때 유용했던 레시피>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무를 채 썰어서 다시다와 소금을 조금 넣고 볶아준다.

2. 밥에 넣어 비벼 먹는다. 깨와 들기름도 뿌려주면 더 맛있다.


레시피가 너무 간단해서 정말 맛있을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었지만, 나와 입맛이 잘 맞는 친구가 하는 말이었기에 믿어보기로 했다.


마침 생채를 만들고 남은 무가 있었기에 채칼로 슥슥 무를 갈았다. 애호박도 좀 남았네? 그럼 같이 갈지 뭐. 내 집 주방에 다시다는 살고 있지 않으니, 대체품이 필요한데…. 어디 보자. 요게 얼추 비슷하지 않으려나. 칼자루 끝으로 내려쳐 조각조각 가루 낸 코인육수를 넣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무가 감기에 좋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왜 감기에 좋지? 팬에 때려 넣은 무와 애호박이 익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음, 비타민씨가 풍부해서 감기에 좋은 거구나. 껍질에 영양소가 있으니 되도록 껍질채 사용…. ㅇ ㅏ …. 껍질은 야무지게 다 벗겨버렸는데;


뭐. 괜찮겠지. 나는 보통 때에도 정해진 레시피를 준수하는 사람이 아닌데, 감기로 축 쳐진 몸을 이끌고 부엌에 서 있으려니 평소보다도 더 적당하고 느슨하게 요리를 하게 되었다. 반투명하게 잘 익은 무나물을 따끈한 밥 위에 얹고 통깨와 참기름을 뿌렸다. 들기름이 더 잘 어울린다는데 없으니까 참기름이라도 넣어보았다. 흠. 아직 뭔가 부족한데. 아! 단백질! 필수 영양소인 단백질이 부족하다. 후다닥 계란 프라이를 부쳐 무나물 위에 올렸다.


“오, 썩 그럴듯해 보이는 걸?”


비주얼은 일단 합격이었다. 그럼 이제 맛을 볼까?


슥-삭, 슥-삭 힘없는 손이 설렁설렁 밥을 비빈다. 감기에 점령당한 코와 혀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입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도 밥이 보약이란 말이 있잖은가. 뭐라도 먹어야 얼른 나을 것 같아 숟가락을 들었다. 텁텁한 입 안에 평소에 먹던 먹음직스러운 빠알간 비빔밥이 아닌, 희끄무레한 무나물 비빔밥이 씹혔다.맛으로 먹을게 아니라 약으로 먹을 메뉴라 맛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슴슴한 맛이 목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갔다. 부담 없이 부드럽게 퍼지는 은은한 무나물의 맛이 좋았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적당히 부른 배는 부대끼는 감이 없이 편안했다. 맞다. 무는 소화에도 도움이 되지. 여러모로 괜찮은 메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플 때는 보통 죽이라지만, 가끔은 죽보다 살짝 더 든든한 무나물 비빔밥도 괜찮겠다.


밥 먹고 비타민 먹고, 식후 30분에 약을 먹고 까무룩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 무 한토막을 넣고 팔팔 끓인 물을 호록 호록 마셨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유난히 독하다는 이번 감기기운이 봄볕에 닿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올해의 민간요법에 선정해 줘도 되겠다 싶었다.


빨갛고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평소 생각해 본 적 없고, 먹어보지도 않았던 무나물과 무나물 비빔밥이었다. 무생채와 뭇국. 무조림으로만 즐기던 무를 맛있게 먹을 방법이 늘어서 만족스럽다.


살다 보면 내 입맛에 맞는 또 다른 무 요리를 만날 날이 오겠지?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입맛을 다시며 기대하는 것이 퍽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사소한 낭만이 모이고 모여 내일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하니.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꼭꼭 머릿속에 잘 저장해 본다. 가끔 나를 찾아오곤 하는, 내일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이 사라진 어느 막막한 날에 꺼내어 볼 수 있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