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무 May 23. 2024

나의 첫 번째 비빔밥

생에 처음 먹은 비빔밥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유치원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나질 않아서, 정확히 언제부터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최초로 각인된 인상적인 비빔밥에 대한 기억이라면 하나 가지고 있다.


어느 늦은 밤, 나는 아빠의 검은색 코란도의 조수석에 앉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도 동생도 없이 아빠와 단 둘이서 하는 외출이었다. 몇 살 때였는지, 어딜 가는 것인지까지는 아쉽게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미취학 아동일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가 작아서 차체가 높은 코란도에 혼자 올라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빠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으쌰- 하고 들어 올려 주어서 조수석에 탑승할 수 있었으니까. 조수석은 늘 엄마가 앉는 자리였다. 때로는 엄마가 동생을 안고 타는 자리였기에 나는 뒷좌석의 답답한 시야가 익숙했는데. 넓게 트인 조수석에 앉으니 보이는 낯선 시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내 코란도의 커다란 핸들을 붙잡은 아빠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아빠와 단 둘이 외출을 하다니. 그것도 밤에? 평상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색함에 몸을 움츠렸다.

아빠는 포크레인 기사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셨다. 그래서 한두 달에 겨우 한 번씩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도 아빠는 내게 몹시 낯선 남자 어른이었다. 부녀가 탄 차는 콩고물에 버무려진 인절미처럼, 어색함이라는 고물을 잔뜩 묻힌 침묵을 싣고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란도가 멈춰 섰다. 아빠는 차에서 내려 내 손을 잡고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테이블에 나란히 않아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기사식당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된장찌개. 청국장. 김치찌개와 알 수 없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메뉴들 사이로 조금 만만해 보이는 글자가 보였다. 비빔밥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을 것처럼 아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빠랑 비빔밥 시켜서 나눠먹자.”


아마도 내가 비쩍 마르고 밥을 조금 먹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손자손녀 확대하기의 전문가인 K할머니 손에 자랐는데도 깡마른 아이였으니, 아빠가 밥을 나눠 먹자는 말은 분명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아빠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내가 오랜만에 보는 아빠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잘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밥을 조금 먹는 아이는 밥을 많이 먹으면 칭찬받는다. 밥을 잘 먹으면 아빠도 할머니처럼 날 칭찬해 주시겠지- 하고 나름의 계산을 마쳤다. 늦은 밤의 외출이라는 상황에 들떠 흥분한 상태였던 나는 몹시 호기롭게 말했다.


“나도 비빔밥. 근데 아빠 거 따로 내 거 따로 먹을래.”


“두 그릇을 주문하자고? 다 못 먹을 텐데.”


혼자서 씩씩하게 한 그릇을 다 먹으면 아빠가 잘했다고, 대단하다고 웃어줄지도 몰라. 아빠의 현실적인 걱정이 담긴 물음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먹을 수 있어!”


“진짜 다 먹을 수 있어?”


밥 잘 먹는 착한 아이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나는 다 먹을 수 있다고 박박 우겼다. 그리고 진짜 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해 있었다. 아빠는 알고 있었겠지. 100% 확률로 다 먹지 못하고 남길 것이라는 걸. 그런데도 무뚝뚝한 얼굴로 알겠다며 주인아주머니에게 비빔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비빔밥은 금세 테이블 위에 놓였다. 냉면그릇 같은 커다란 스테인리스그릇이 탁. 내 앞에 놓인 순간부터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릇이 너무 컸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몇 숟가락 먹지도 못하고 몽땅 남겼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아 산더미 같이 느껴졌던 비빔밥에는 밥과 나물, 계란 프라이와 고추장에 곤란함과 만용이 추가로 토핑 되어 양이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결국 내가 한가득 남긴 비빔밥은 아빠가 꾸역꾸역 드셨다. 아빠도 다 드시지 못한 비빔밥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검은 코란도를 타고 밤 길 위를 다시 달렸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밥 잘 먹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엄마와 할머니 앞에서 밥을 열심히 먹었다. 다만 아빠 앞에서는 먹부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아빠 앞에서 크게 실패한 충격이 나름 컸던 탓일 테다.  나의 첫 번째 비빔밥은 이렇게 씁쓸한 맛으로 남았다.




여담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요즘도 아빠는 가끔 음식을 나눠 먹자고 하신다. 주로 집 근처 단골 순대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포장할 때 그렇다. 포장 용기에 국물과 건더기를 한가득 한계까지 눌러 담아주는 국밥집 사장님의 넉넉한 인심 덕분이기도 하고, 저녁에는 어지간하면 과식을 피하는 아빠의 습관. 그리고 밥을 조금 먹는 딸아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지 못한 나의 탓이 이유인 듯하다.국밥 한 그릇으로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친 후, 아빠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묻어난다. 가성비에 관심이 많고 음식 낭비를 싫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기꺼울 상황이기는 했다. 다만 아빠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나는 비빔밥 몇 숟가락에 배불러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걸로 배가 찰 거라고 생각하시다니…!’


아빠의 눈에 나는 여전히 홀로 비빔밥을 비워내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항상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평생을 타 지역을 떠돌며 일한 아빠는, 딸이 자라나는 걸 띄엄띄엄 봤기 때문에 딸에 대한 정보가 원활하게 업데이트되지 않은 걸까? 저체중으로 깡말랐다는 소리를 들은 건 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초등학교6학년 무렵에 할머니가 드디어 손녀를 살찌우는 데 성공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끓여진 사골곰탕의 대활약과 겨울방학이라고 움직이지 않고 누워서 뒹굴대기만 했던 게으른 손녀의 콜라보로 두 달 만에 10킬로를 증량하는데 위업을 달성하는 바람에, 저체중을 벗어나 신장에 적당한 체중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이런저런 일로 받은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면서 점점 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엄마와 둘이 밥을 먹을 때면 그만 먹으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도 하는데. 아빠와 밥을 먹을 땐 그런 적이 없다. 딸아이의 살찜의 주범은 음식이 아니라 운동부족이라 생각하실 아빠에게 딸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해드려야 할 것 같다.


아빠, 전 이제 진짜로 밥 잘 먹는 착한(?) 딸이 되었답니다. 예전의 저는 잊어주세요.

오늘은 비빔밥을 한가득 비벼서 설욕전을 치러야겠다. 갓 지은 뜨끈한 흰쌀밥에 무생채와 계란 프라이. 콩나물과 김치와 구운 차돌박이. 고추장과 약간의 설탕을 넣고 참기름을 듬뿍 뿌려서 싹싹 비비자.


이제 나는 밥 잘 먹는다는 칭찬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많이 먹을 줄 알다고 어필하기 위해 억지로 밥을 먹지 않는다. 칭찬 없이도 비빔밥 한 그릇쯤은 거뜬히 비워내고 후식도 해치울 수 있는 씩씩하고 늠름한 어른이 되었으니까.


아빠 너무 놀라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