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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타멀스 Apr 10. 2022

자연인의 조건

허구한 날 밤낮으로 술만 마시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입산한다며 지팡이 하나 들고 백린산으로 들어갔다. 산언저리에 이르렀을 때 홀로 가을보리를 갈고 있는 동네 할매를 보고 정중히 인사를 하며 묻지도 않는 말을 큰 소리로 외친다.

“제가 오늘부터 술을 끊고 산속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살라고요!”

할매는 구부정한 허리를 일으키고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그의 지팡이를 가리킨다.

“이걸로 뱀을 잡아먹으려고요. 자연인도 먹고는 살아야죠.”

할매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하산했다. 산언저리에서 그 할매를 보고 또 정중히 인사를 한다.

“생각해 보니 뱀들은 동면에 들어갔고 그래서 도토리 몇 개 주워 먹어 봤는데 도저히 떫어서 못 먹겠어요. 내년 봄에 다시 입산해야겠어요.”

그는 술을 마시며 겨울을 보냈고, 쑥국새가 우는 다음 해 봄날 지팡이 하나 들고 다시 입산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는 지팡이로 땅바닥을 툭툭 내려치며 터덜터덜 하산하고 있었다. 산언저리에서 달래를 캐고 있는 할매가 허리를 숙인 채 쳐다본다.

“아직 뱀이 나오지 않았어요. 며칠 더 기다려야겠어요.”


 그는 봄볕을 쬐며 며칠을 술만 마시다가 지팡이도 없이 다시 입산했다. 산언저리에서 쑥을 캐고 있는 할매가 지팡이 짚는 시늉을 하자 헛웃음을 지며 소리친다.

“생각해 보니 지팡이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초근목피를 뜯어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할매가 손짓으로 그를 불러 쑥 바구니를 건네주며 말한다.

“내가 내년이면 구십이 되는 할망구야. 웬만하면 내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진득하게 자연인인가 뭔가 한번 제대로 해봐, 이 사람아.”


일 년이 지난 어느 봄날 그는 하산했다. 민들레를 캐던 할매가 기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일 년 동안이나 산에서 살았는데 뭘 먹고살았는가?”

그는 백린산을 뒤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산은 삼겹살이고 물은 소줍니다.”   


할매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내가 죽을 때가 된 모양이네. 헛것이 다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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